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3. 교토의 역사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유홍준 지음
창비 2014.5.15. 초판 1쇄 발행. 2020. 9.20. 개정판 1쇄 발행.
(2021.7.31~8.5)
나는 올 초봄인 2월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규슈
일본편 2. 아스카, 나라.
를 재미있게 읽었고, 1.2편을 읽고 계속해서 3편을 읽고 싶어
우리동네 한강도서관에서 대출신청을 하였지만
일본편은 1. 2편만 있고, 그 뒷편은 새로 구입해야 한다고 하였다.
도서관에는 아직 내가 보고 싶은 다른 좋은 책들도 많았고,
그 후로 도서관은 사회적 거리두기단계가 격상되어 한동안 문이 닫혔다.
다시 도서관을 이용하게 된 이후로 나는 가능한 많은 책을 대출해왔다.
1인당 대출가능권수가 7권이어서, 딸 아라의 대출증도 사용하여 빌렸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여 항상 곁에 책을 쌓아두고 있었지만
책의 내용이 어렵거나, 일이 바빠 제대로 읽지도 못하였지만,
책표지만 읽어도 흐뭇해졌으니 일종의 지적인 허영심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번 여름에도 사회적거리두기가 4단계로 격상되었지만,
다행히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어 얼마나 나에게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문득 봄에 읽었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의 뒷편들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고 희망도서 신청을 하였더니, 며칠 전
신청도서를 구입했으니, 대출가능하다는 문자가 와서 반가운 마음으로 대출해 왔다.
3편 <교토의 역사>는 '책을 펴내며'를 시작으로 교토 사찰의 시대별 일람표,
교토의 지도. 제1부 헤이안 이전. 제2부 헤이안시대. 부록 1.2로 구성되어 있다.
교토는 일본 역사에서 1천 년간 수도의 지위를 갖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13곳의 사찰. 3곳의 신사. 1곳의 성이 있다.
교토의 관광안내서에는 낙중. 낙동, 낙서, 낙남, 낙북지역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소를 중심으로 토축을 쌓으면서 그 안쪽을 낙중,
바깥쪽을 낙외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나눈데서 유래한다.
교토 답사에는 4갈래의 코스로 나누는데,
1. 교토가 일본의 수도로서 역사의 전면에 떠오르기 전의 유적지 순례.
2. 헤이안시대(8~12세기)의 개막과 함께 창건된 동사와 연력사.
3. 우지에 있는 평등사 답사(헤이안시대).
4. 백제계 도래인 후손인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세운 청수사. 라고 하였다.
제`부 헤이안 이전 에서는
광륭사. 하타씨 유적 순례. 아사카 신사와 기온마쓰리.
제2부 헤이안 시대에서는
후시미 이나리 신사와 고려사터. 헤이안쿄. 동사. 히에이산 연력사.
히가시야마의 청수사. 우지 평등원 등이 설명되어 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구분하는 우리의 역사와 달리
일본은 아스카시대. 나라시대. 헤이안시대. 모모야마시대. 에도시대 등으로
구분하였는데 헤이안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음백과 사전으로 검색해 보았다.
-헤이안시대(794~1185)
시대명은 794년 나라[奈良]에서 천도한 헤이안쿄[平安京:교토]의 이름을 땄으며,
정치·문화의 중심이 헤이안쿄에 있었던 시대이다.
9세기 중엽부터 조정은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지배를 받았는데,
후지와라 씨는 집안의 딸들을 왕의 후사와 결혼시키는 정책에 의해 섭정으로 왕실을 지배했다.
이 가문의 영향력은 후지와라 미치나가[藤原道長]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지방군벌들간의 싸움에서 다이라 씨가 승리해 1185년까지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제 1부 헤이안 이전
광륭사(고류지)는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신라에서 보내준 것으로 전하는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의 국보 제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비슷하다.
이 불상은 등신대의 크기로 반가부좌 자세이며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 채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위에 올려 놓고,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원을 그리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위에 올려 놓고 있다.
사실적이며 완벽한 형식미를 갖추고 있어 불상이면서도 인간의 모습이 느껴져
신과 인간의 절묘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라고 하였다.
광륭사의 반가상은 손가락으로 상투적인 원을 그리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은 얼굴에 손을 대고 명상하다가
법열에 들면서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발가락은 살짝 움직이고,
손가락을 빰에서 막 떨어지려는 순간을 나타냈으니 예술성이 더 높다고 하였다.
광륭사 신명보전에는 십이지신상, 우는 반가상.쇼토쿠 태자상.
이 절을 창건한 진하승 부부(한반도 도래 씨쪽 하타씨의 후손)의 초상조각상이 있다.
한반도 도래인 하타씨에 대한 설명, 누에 신사. 헤비즈카라 뱀무덤. 대언천의 도월교.
가메이야 공원의 주은래 시비. 일본의 택시기사와 단팥죽집의 직업윤리의식 등을 설명하였다.
일본은 스스로 '마쓰리의 나라'라고 말하는데, 교토의 3대 마쓰리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헤이안 신궁의 지다이마쓰리. 가모 신사의 아오이마쓰리. 야사카 신사의 가온마쓰리를 꼽는다.
헤이안 신궁.가모 신사.기온의 야사키 신사에 대한 설명과 야사카탑이라고 불리는
법관사(고구려계 도래인이 창건한 절) 오중탑. 교토의 심장이라는 기온 거리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제2부 헤이안시대
한반도 도래인들이 창건한 야사카 신사. 마쓰오 신사. 후시미 이나리 신사.
상 하 가모 신사에 대한 설명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시미성에 대한 설명.
귀무덤으로 일컬어지는 이총 맞은편의 히데요시를 제신으로 하는 도요쿠니 신사.
화려함을 특징으로 하는 모모야마 시대의 상징적 사찰 고대사에 대한 답사기였다.
모모야마시대 건축의 중요한 특징인 장식성과 화려함을 보여주는 후시미 이나리 신사.
후시미성 전투에서 할복자살한 장수들의 핏빛으로 물든 낭하의 나무판을 만든 피의 천장.
이나리 신사 남쪽에 있는 고구려계 도래인이 자리잡고 살면서 세원 고려사터의 시비에
대한 설명과 함께 답사하였던 일행과의 에피소드들이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었다.
교토의 랜드마크인 동사의 오중탑. 헤이안쿄의 건설과 동시에 세워진 동사에 얽힌 이야기.
헤이안쿄의 마스트플랜과 함께 공해 스님(진언종의 개조) 창건한 동사.
최징이 개창한 천태종의 연력사 (진언종과 천태종은 헤이안시대의 불교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에 대한 설명과 , 진언종의 밀교와 만다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일본 불교의 성현이라고 추앙받는 공해와 최징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최징은 연력사가 있는 히에이산에서, 공해는 고야산에서 근본도량을 두었다.
왕실은 두 스님의 종단활동을 적극 후원하여 공해에게 동사를 하사했고,
최징의 히에이산 절에는 '연력'이라는 연호를 내려주며 귄위를 세워주었다.
동사는 진언종 사찰로 진언종은 진언밀교라고도 하며,
공해는 사후 흥법대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본질의 소유를 뜻하며,
불성의 비밀스런 세계를 도상으로 그린것이다.
동사에는 오중탑과 함께 강당의 입체 만다라. 금당의 약사삼존상.
공해의 초상을 모셔놓은 어영당(일반에게 비공개),진언종의 관정을 하는 관정원.
보물전의 밀교의 법구와 불상. 만다라. 지장보살입상. 천왕상이 있다.
특히 보물전의 '고려 사경 법화탑'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8세기 이후로 일본은 한반도를 넘어 당나로 문화를 직접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당나라로 가는 뱃길은 험난하였으나, 통일신라와의 관계 악화로 신세를 지지 않았다.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인 것을 일본문화사에서는 당풍문화라고 한다.
공해와 최징이 직접 당나라에서 진태종과 천태종을 들여와 기존 일본 불교를 혁파하고
토착화하였으며 이로써 일본은 당풍문화에 일본문화를 혼합한 국풍문화를 쌓았다.
교토 시내의 북쪽 히에이산은 일본의 영산으로 칭송되며 그 산속에 있는 연력사는
지금도 성지순례하듯 많은 사람이 찾아가는 사찰인데, 최징은 22세 때 (788년)
히에이산 에 암자를 짓고 자신이 손수 제작한 약사여래상을 모셨는데,
이것이 오늘달 연력사의 핵심건물인 근본중당의 시원이라고 하였다.
이 불상앞에 밝힌 등불은
어떤 전란에도 꺼지지 않아 100년을 이어져와 '불멸의 법등"이라고 한다.
최징은 마을로 내려와 천태사상을 전파하였는데 간무 천왕에게 발탁되어
804년 견당사 국비 유학생으로 당나라에 파견되어 천태사 수선사에서 보살계를 받고
귀국한 후 806년 천태종을 개창하였고, 천태종과 밀교를 결합시켜 태밀이라고 하였다.
822년 최징이 55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는 전교대사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연력사의 핵심건물인 근본중당은 장대하고 사방이 움푹한 곳에 위치해 있다.
회랑으로 둘러싸인 중문을 지나면 근본중당이 축대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 9칸, 측면 6칸, 높이 10미터로 그 위세가 당당하고 위압적이라고 하였다.
법당 안의 분위기는 삼엄하며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하고 사진쵤영은 금지라고 하였다.
문수루, 동탑. 대강당 등 당우가 산자락에 붙어 있어 건축학적. 미학적은 아니었다.
청수사는 본래 절집이 들어앉기에는 부적절한 자리에 있으나, 벼랑의 가파름을 역이용해
넓은 무대를 설치함으로써 깊은 산속의 아름다움과 넓게 트인 전망을 갖게 하였다.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십일면관음보사상에게 기도를 드리러 가는 명찰로,
오늘날 하나의 전설이 된 '청수의 무대'는 오랜 역사의 연륜속에 이루어졌다.
청수사는 백제계 도래인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 장군이 창건한 절이다.
교토시 히가시야마 36봉 중 기요미즈산 서쪽 중턱에 있으며 맑은 샘물이 있다.
다마라무로가 근위대 간부로 있을 때 연진 스님과 힘을 합쳐 정수사를 세웠다.(780년)
사카노우에는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었는데 훗날 막부시대의 쇼군將軍의 호칭이 되었다.
사카노우에가 창건할 당시 청수사는 작은 씨사에 불과하였으며 천왕으로부터
넓은 부지를 하사받고 왕실의 원당 사찰로 격상되었으며 참배객이 줄을 이었다.
이후 청수사는 소실과 재건, 파괴와 복원을 거듭했고, 지금의 모습은 에도시대1633년에 재건되었다.
1868년 메이지 정부의 폐불훼석 때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지금은 30여채의 당우가 있다.
청수사 답사의 핵심은 '청수의 무대'가 있는 본당인데 여기를 오르려면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
인왕문과 서문, 상중탑. 마구간. 작지만 예쁜 정원인 성취원. 개산당이 있는데, 개산당 안에는
이 절의 창건한 사카노우에와 그의 부인 연진 스님과 장로 네분의 목조각초상이 모서져 있다.
청수의 무대는 높이 13미터로 이를 떠받치는 나무 기둥들이 못을 사용하지 않고 조합되었다.
茶로 유명한 우지는 교토의 동남쪽 후시미 아래에 있는 아담한 전원도시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우지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신사 건물중 가장 오래된 우지가미 신사와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권력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1053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우지의
별장을 사찰로 개조하면서 극락세계를 구현한 아미타여래상을 봉안한 평등원이 있다.
헤이안시대 400년 기간 중 9세기 중엽부터 11세기 중엽까지 200년간은
후지와라시대라고 하며 후지와라씨가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천왕가에 딸을 시집보내
외척으로서 정치에 깊이 개입하였으며 이후 일본은 섭정과 관백에 의해 국정이 주도되었다.
평등원은 미치나가가 우지의 별정을 매입하였고 그의 아들이 극락세계를 구현한 사찰이다.
평등원 법당안의 조각과 벽화는 모두 일본의 국보이며, 평등원의 보물관 봉상관,
용마루에 한 쌍의 봉황이 있는 평등원 봉황당은 일본의 10엔짜리 동전에 나온다.
봉황당안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상 야경의 아름다움과 봉황당 앞의 연못인 아자못,
연못가의 소나무와 수양벚꽃, 뒤편의 단풍나무와 관음당 앞의 등나무에 대한 글이었다.
우지시에는 겐지모노가타리(겐지 이야기) 박물관이 있는데,
<겐지 이야기>는 일본의 전설적인 고전소설로 헤이안시대 국풍문화의 상징이다.
1001년 무렵 무라사키 시키부라는 여류작가가 쓴 200자 원고지 4800매 장편소설로
등장인물이 300명 이상이고 소설 속 시간적 배경은 3대에 걸친 70여년간이다.
일본은 10세기에 가나가 발명되어 소설이 나오고, 일본인의 서정을 담은
'와카'라는 시형식을 갖추어 일찍이 국풍문화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가나의 발명과 사용
덕분이었지만, 그때 만들어진 후 자기 진화를 못하고 있어 띄어쓰기를 못하여 불편하다.
그림에서는 일본의 자연과 풍속을 그린 야마토예, 이야기를 전개한 에마키가 등장했다.
나는 <일본편 3 교토의 역사>를 읽으면서 내가 오래 전 여행을 하였던 교토를 기억해 보았다.
그때는 일본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은 것도 없고 일본 소설만 몇 편 읽었을 뿐이었다.
교토는 우리나라 경주와 같이 옛수도 비슷한 지역이구나...이런 생각만 갖고 있었다.
지금 책에서 읽었던 광륭사. 청수사와 연력원, 평등원을 가보았는지 기억도 없다.
그때는 내가 아직 블로그를 하지 않을 때여서 여행기를 쓰지도 않았으므로,
몇 장의 사진과 함께 금각사와 은각사에서 사온 기념접시가 남아 있을뿐이다.
다시 교토를 여행갈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중급 일본어 책에
'청수의 무대' 와 '우지의 말차'(빙수)에 대한 글이 있어 더욱 가깝게 여겨졌다.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0) | 2021.09.01 |
---|---|
그린 나이트(영화 감상문) (0) | 2021.08.18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서울편 1 (0) | 2021.07.07 |
순이삼촌 (0) | 2021.06.24 |
먼 바다 (0) | 2021.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