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멘토 최태성의 한국사
-근현대편:꿈을 찾는 한국사
최태성 지음
푸른들녁 출판사
(2019.3.9~21)
지난해 년말 우연히 서점에 가서 선택하였던 역사멘토 최태성의 한국사
-전근대편 소통하는 한국사를 읽고 그 다음편인 근현대편을 읽고 싶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3월 독립기념 100주년을 맞이하여 서점에서 구해왔다.
책을 구해 놓고도 왜 그리 할 일도 많은지 며칠전 3월 중순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학창시절 국사공부는 잠오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특히 근현대편은
격변하는 사회속에서 사건도 많고 외울 것도 많고 골치 아픈 과목이었다.
조선시대 영정조를 지나고 나면 사색당파와 세도정치로 혼란스러웠다.
조선말의 그 많은 사건의 명칭과 연대 외우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싫었다.
한국사 근현대편은 -저자의 말-에 이어
1부 개항기-그때 우리에겐 꿈이 있었다.
2부 일제 강점기-절망에서 저항으로
3부 광복 이후-역사는 굼꾸는 자의 몫이다. 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의 말에서 역사는 과거의 사실들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만들어 낸 사람을 만나고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지금을 살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인지 고민하는 학문이라고 하였으며,
역사를 통하여 과거의 사람과 소통을 하며 역사라는 거울 앞에 반듯하게 서자. 하였다.
1부 개항기-그때 우리에겐 꿈이 있었다.
1부에서 저자는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마라고 일침을 놓았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1876년 개항부터 1910년 까지는 개항기,
국권 피탈이후부터 1945년 까지 일제강점기.
광복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기까지 현대. 이렇게 3덩어리로 구분하였다.
근현대사를 각 시기마다 역사를 일구고 나간 사람들의 꿈을 통하여
만나 보려고 노력하여 개항기는 신분제로부터의 해방.
일제강점기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광복 이후의 현재는
독재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 그 시대의 과제이며 꿈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조 사후 기울어 가는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개혁을 한 인물은 흥선대원군으로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도움으로
그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올리는 데 바로 26대 왕 고종이다.
조대비의 수렴청정이후 흥선대원군이 1863부터 1873년 까지 10년간 집정하였다.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가지 개혁을 시행하였다.
경복궁을 중건하고 법전을 만들고 사원을 정리하고 삼정을 개혁하였다.
서세동점의 세계정세로 청과 일본이 무너지는 것을 본 그는 통상수교를 거부하였다.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치고 난 후 민씨정권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는다.
강화도조약으로 문을 연 조선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로 세력이 갈라진다.
개화파에는 김홍집.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이 있었으며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고
선진문물을 배워 왔으며 1882년 서양의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한편 성리학파의 보수세력은 통상을 반대하며 1890년 이후 의병투쟁을 한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청을 불러 들이고 청의 도움으로
정권을 유지하지만, 일본은 제물포조약으로 일본 군대를 조선에 주둔하게 한다.
외국 세력을 끌여들여 정권을 유지하기는 쉽지만 그 댓가는 지불해야만 하였다.
외교에는 절대 우방도 없고 혈명도 없고,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이 존재한다는 교훈.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일본의 세력을 끌여 들여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갑신정변의 주역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의 청년들이었는데,
그 당시 잘나가는 집안의 자제들이었지만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꿈을 꾸었으며
신분제 페지, 재정의 일원화 등의 14개조 개혁안을 발표하였으나 3일 천하로 막을 내린다.
청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막을 내리자 고종은 청의 내정간섭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와 비밀협정을 맺고, 러시아의 라이벌인 영국이 1885년 거문도를 점령한다.
기득권층은 외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기층민중인 농민들은 반외세, 반봉건의 깃발을 들고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다.
1894~1895년 두 해에 걸쳐 갑오개혁이 일어났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끼 조약을 맺어 조선에서 주도권을 거머쥐게 된다.
1895년 일본은 러시아를 끌어들인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하고,
친일적인 김홍집은 제 3차 갑오개혁을 단행한다.( 을미개혁)
명성황후를 잃은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을 한다.
개항 이후 집권세력의 목표는 조선의 백성이 아닌 오직 정권유지였다.
아관파천 이후 1897년 고종은 환궁을 결심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2년 후인 1899년 왕권강화. 민생안정을 위한 광무개혁을 단행한다.
이 무렵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단체인 독립협회가 1896년 등장하여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민중의 계몽활동을 벌리고, 1898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시민들이 모인 정치 집회인 만민공동회가 열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저지하고, 한러은행을 폐쇄하였는데 이때의 힘의 원동력은 바로 '민'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의 대열에 서는데
고종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미국에 원조를 청하지만
미국은 이미 일본과 가쓰라-태프트밀약을 맺은 상태였으므로,
힘없는 나라 고종의 국외중립선언은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일본은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는 2차 영일동맹,
러시아와는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권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고, 1905년 2차 한일협정(을사조약)을 체결한다.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박탈하고, 1910년. 8월 29일 주권을 박탈한다.
을사조약을 체결한 1905년에 이미 대한제국의 식민지화 작업을 완료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까지 5년의 지연이 있엇던 것은 의병들의 투쟁 때문이었다.
의병투쟁은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의병투쟁과 같은 집단투쟁 외에 민영환, 장지연 등 개인의 의열투쟁도 있었다.
2부 일제강점기-절망에서 저항으로.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1910년대, 20년대, 30년대 이후 각 시기별로
식민지배 정책을 바꿔나가며 세계사의 흐름과 연관되어 우리민족을 탄압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고 민족자결주의가 결정된다.
한가닥 희망을 가졌지만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 조선은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찾아오고 미국은 뉴딜정책을 펼쳐 공황을 극복한다.
일본은 초과생산된 물품을 소비하기 위하여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초과공급된 물자를 처분하려고 하였으나
이러한 침략 전쟁의 확대는 결국 일본을 파국의 길로 몰아넣게 된다.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본은 무단통치를 실시한다.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을 억압하였으며 우민화 정책 교육을 시행한다.
찍어 누르면 그만일 줄 알았던 한국인이 1919년 3.1운동을 분연히 일으키자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헌병경찰을 보통경찰로 바꾸어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1930년대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강화하여 민족 말살 통치를 실시한다.
황국신민으로 일왕을 숭배하게 하고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실시한다.
창씨개명과 조선어 교육 금지를 당한 민족의 아픔은 윤동주의 시
<별헤는 밤>에 잘 나타나는데 다시 읽어보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조선에 설립하여 토지를 빼앗고,
신미증식계획을 세우고 철도를 세워 조선의 물자를 일본으로 수탈해간다.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군수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한국인 노동자를 동원한다.
여자 정신 근로령을 공포하여 노동력을 착취하고 일본군 위안소로 끌고 간다.
일제의 식민 지배 정책 기간 일제에 동조하여 자신의 안위를 도모한 사람이 있는 반면,
대성학교 출신들이 자립단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고 숭의여학교는 송죽회를 조직한다.
성리학적인 성격을 가진 독립의군부, 박상진. 김좌진 중심의 대한공복회가 창립된다.
김좌진은 대한광복회 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넘어가 청산리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31운동으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화하는 계기가 되고 민족운동의 활성화가 된다.
연해주 지역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결성된다.
독립신문도 발행되며 1931년 임시정부의 김구는 한인애국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고,
이봉창과 윤봉길이 의거를 일으키는데 이때부터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1910년대 저항운동은 국내에서는 비밀결사, 국외에서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하였고,
1920년대는 국내저항운동으로 대중운동, 의열투쟁, 실력양성운동, 쟁의 투쟁을 한다.
1926년의 6.10만세운동으로 신간회가 창립되며,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다.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고 어린이날이 제정되고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가 창립된다.
1930년대 이후 중국 관내에서은 항일 운동은 김원봉이 1935년 민족혁명당을 결성한다.
민족혁명당은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세 단체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다.
한국독립당는 조소앙, 조선혁명당은 지청천, 의열단은 김원봉으로 좌우합작의 성격.
김구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한국국민당이라는 1935년 독자적인 당을 만든다.
1940년이 되면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이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의 충칭에 정착하여 한국광복군을 창설한다.
김원봉 등 조선의용군 세력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한다.
해방후 어떻게 나라를 이끌것이가 준비를 하였지만 일본의 패전으로 광복을 맞는다.
3부. 광복 이후-역사는 꿈꾸는 자의 몫이다.
현대사는 광복으로 출발하지만, 우리는 세계 정세의 흐름속에 민족분단을 맞게 된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미국은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다.
전쟁 전 같은 연합군이었던 소련과 결별하는 냉전으로 돌입한 세계의 정세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1세계 국가들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제2세계 국가들이 충돌한다.
광복이 되었지만 독립 운동을 하였던 지도자들으 좌와 우로 세력이 나뉘어 진다.
김일성, 박헌영을 중심으로 좌익,이승만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 우익으로 갈라 선다.
중도우파에는 안재홍과 김규식, 중도좌파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한
여운형이 안재홍과 손잡고 1945년 광복직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건준위는 미국이 들어오기 전 건국을 선포하고 국명을 한국인민공화국이라 명한다.
미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정하고 김구에게는 개인 자격으로 입국을 허락한다.
맥아더포고문을 통하여 친일파들을 선택하고 남쪽만이라도 자신의 영역권 안에 둔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좌우합작운동에서 실패하고 우익과 좌익은 민족보다는 이념을 향해 치닫는다.
UN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하여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 방식을 채택한다.
1948년 소련의 거부로 남북한 총선거가 죄절되자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정하다.
1948년 5.10 총선거에 김구 등 남북협상파는 불참하고 이승만의 한국민주당이 승리한다.
초대 국회가 만든 헌법인 제헌헙법의 내용은 삼권분립과 대통령제가 핵심이다.
간선제 방식으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된다.
8.15 남한에서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도 9.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을 서곡으로 남 북한간에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벌어진다.
6.25전쟁이 발생하자 전쟁 샹황은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질풍노도처럼 내려온다.
이때 UN군이 신속히 투입되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 간다.
중국이 개입하면서 전세가 바뀌어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흥남 철수하고 남쪽으로 후퇴한다.
자칫 세계3차 대전이 벌어질 상황에서 1953년 휴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다.
1952년 이승만은 발췌개언을 통해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철폐한 후 다시 대통령에 취임한다.
1956년 대선으로 정권을 잡은 능수능란한 이승만 정권은 강력한 반공체제를 선포한다.
1958년 신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이듬해 진보당의 조봉암을 사법살인으로 사형시킨다.
1960년 선거에서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이 나온다.
부통령 이승만을 당선시키기 위해 자유당은 3월 15일 선거에 부정을 저지르고,
선거 당일 날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반발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김주열 학생이 사망하였는데 경찰이 그 시신을 바다에 내다버린 사건이 발각된다.
315부정 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4.19혁명으로 제 1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대통령은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르고, 과도기를 이끌 임시정부로 허정 과도내각이 구성된다.
허정 내각이 실시한 3차개헌으로 의원내각제와 양원제의 제2 공화국이 탄생한다.
대통령 윤보선, 총리 장면의 제 2공화국은 소금입법을 주장하는 4차 개헌을 한다.
제 2공화국 출범 이후 장면 내각은 열심히 활동하였으나 시민들의 학원 자율화 요구,
6.25 전쟁 유가족의 양민학살 진상조사 등 다양한 요구가 쏟아지는데 이러한 상황을
위기라고 생각한 박정희 중심의 군인들이1961년 반공을 국시로 하는 정변을 일으킨다.
군사정권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조직하여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일을 처리한다.
1962년 5차 개헌을 하여 대통령제로 환원하고, 1963년 군복을 벗은 박정희가
제 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군인 출신이 중심이 된 제 3공화국 시대가 열린다.
제 5공화국은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최고의 명분을 슬로건으로 경제개발에
주력하려고 하였으나 돈이 없어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차관을 받는다.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였으나 돈이 턱없이 모자란 박정희정부는
미국의 권유에 따라 일본의 돈을 긁어 들이기 위해 1965년 한일수교를 조인한다.
일본이 한국에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를 제공하는데 각자의 문서에
한국은 식민지 배상금으로, 일본은 독립 축하금으로 서로 다르게 기록한다.
한일수교의 굴욕적인 내용에 반발하는 대학생들이 일으킨 6.3시위는 계엄령으로
해산시키고 일본으로 부터 돈을 받아내고, 1964~1974년 동안 월남파병을 통하여
한미동맹이 강화되고 미국의 경제적 군수적 협조를 받아 경제발전에 동력을 얻는다.
'베트남 특수'로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던 한진그룹이 특혜를 받아 급성장을 한다.
1969년 3선 개헌을 골자로 하는 6차 개헌을 단행하여 1971년 박정희가 당선된다.
세계정세의 흐름에 따라 통일로 프레임을 바꾸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다.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남한은 유신헌법, 북한은 사회주의헌법을 통과시킨다.
7차 개헌인 유신헌법으로 대통령의 임기는 6년, 간선제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주관한다.
정부는 유신체제 아래 대통령에게 부여된 초헌법적인 권한의 긴급조치권을 발표한다.
긴급조치권을 발동하여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을 구속하고 언론을 탄압한다.
김대중을 납치하고 민청학련을 불법단체로 엮어 구속하고 인혁당원을 사형선고 한다.
1979년 YH무역사건이 일어나고 여성 노동자를 탄압은 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진다.
10.26사태가 일어난 후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제 10대 대통령에 오르는 과도 정부가
구성되지만, 12.12사태의 쿠데타를 통해 군인 출신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가 등장한다.
1980년 봄 서울역 광장을 가득 메운 학생과 시민들의 유신철폐 구호를 계엄령 확대로 선포한다.
5.17 계엄령의 확대로 시위가 수그러 들지만 광주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전두환 정권은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한다.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가혹행위로 탄압하고 언론통폐합을 실시하여 언론을 탄압한다.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1980년 8월에 제 11대 대통령에 선출된다.
7년 단임제, 간선제가 핵심은 8차 개헌을 통하여 전두환은 1981년 2월 12대 대통령이 된다.
제 5공화국의 전두환 정부는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자율화라는 정책,
해외여행 자율화, 통행금지를 시행하고 국풍 81 같은 대규모의 페스티벌을 연다.
전두환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을 내놓았지만 언론 탄압등 가혹한 탄압을 한다,
1986년 부천경찰서에서 성고문 사건이 터지고,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생긴다.
박종철의 부검에 참여했던 의사의 양심선언으로 국민들의 분노는 치솟고 시위가 번진다.
4.13호헌조치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 도중 이한열 연세대 학생이 최루탄에 쓰러진다.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학생들과 시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거세게 번진다.
결국 전두환 정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여 6.29 민주화선언을 발표한다.
6.29선언으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9차 개헌)로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노태우 정부는 지방자치제를 부분 실시하고 북방외교 정책으로 남북한 UN동시 가입한다.
3당 합당을 통해 1992년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제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펼쳐 12.12사태. 518민주화운동 진압자를 처벌하고,
지방 자치제를 전면 실시하고, 금융 실명제를 실시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다.
그러나 시장 개방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에 1997년 외환위기를 맞게 된다. (IMF사태)
외환위기속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IMF관리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한다.
온 국민이 부족한 외환을 보충하기 위해 금모으기 운동을 전개하여 4년만에 조기 상환한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을 통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하고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다.
노무현 정부는 권위주의 청산, 지역의 균형 발전, 과거사 진상 조사 등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계승한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실용주의를 표방하고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 등기업 활동 규제를 완화하고
자원 에너지 외교를 강화하여 친환경 녹색성장을 내세우며 4대강 정비사업을 시행한다.
2013년 '국민 행복'시대를 표방하며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였으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져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발의, 2017년, 3월 10일 대통령직에서 파면된다.
제 19대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화해,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2018년 4월 27일 역사상 세 번째의 남북정상회담에서 종전 선언의 판문점 선언을 한다.
지은이는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하고 묻는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더 건강한 대한민국을 물려 줄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를 통하여, "한 사람이 실패한 것을 모든 사람이 물어야 하고,
한 시대의 실패를 다음 시대가 회복할 책임을 지는 것이 역사다."라고 말한다.
혹시 우리시대의 문제점이 있다면 그건 우리 스스로가 고쳐 나가야 하고
앞 세대가 우리에게 하였듯이 우리도 후손들에게 소중한 선물을 남겨 주어야 한다. 고 한다.
조선 말에서 시작하여 제19대 문재인 정부까지의 근현대편 '꿈을 찾는 한국사'를 읽으면서
감동으로 가슴이 울컥하기도 하고, 눈물이 흘리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막상 책을 덮고 나니 그 숱한 내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간략하게나마 독후감을 쓰면서 다시 한 번 더 책을 읽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기억력이 나빠져서 며칠만 지나면 거의 잊어버리겠지만 학창 시절에 어렵게 여겼던
근현대사를 다시 한번 공부하는 마음으로 정리하게 되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이 글을 쓴 최태성선생님께 진심으로 큰 절을 올리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아울러 어려운 현세를 살아가는 내 이웃들에게 모두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2019. 4.2. 씀)
최태성의 한국사 근현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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