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난중일기 독후감

푸른비3 2019. 2. 13. 11:25

난중일기 (개정판 교감완역)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여해 출판산

(2019.1.24~2.12)


지난해 초여름 아산 현충사에서 열린 <이순신 추모 시조창 대회> 행사에 참석하여

주관하신 이석희님이 주신 <난중일기>를 책장에 잘 모셔놓고 바라보기만 하였다.

600페이지에 이르는 두툼한 책의 부피가 선뜻 손이 가지 않게 하였으나

귀한 책을 선물해 주신 이석희님에게 항상 마음의 빚을 지닌듯 불편한 마음이었다. 


어린 시절 동화책으로 편찬한 세계위인 전집에서 읽은 <성웅 이순신>은 역사상

참으로 존경할 분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분이 전장에서 기록한 <난중일기>를

기회가 닿으면 꼭 한 번 읽어보리라 생각하였지만, 막상 귀한 책을 선물로 받고도 

세상의 잡다한 이야기 꺼리에 더 마음이 쏠려 사실 이 책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요즘 연일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는 일본의 아베 총리와 고노 외무상,

한국 함선에 저공 근접 비행을 하는 일본정부의 형태는 책장에서 잠자고 있는 

이 책을 읽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오래 미루어 두었던 숙제를 하듯이

정성을 기울려 완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성경과 함께 매일 조금씩 읽었다. 


이순신은 자가 汝諧, 시호가 忠武이며 어려서 부터 문인의 소양을 쌓고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10년 만에 식년 무과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에 발탁되면서 해상의 중요한 임부를 맡고, 임진왜란시에

삼군수군통제사가 되어 삼도의 수군을 관장하여 여러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전공을 쌓았다.


청렴하고 강직한 그의 성품으로 시기와 모함을 받아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정유재란 당시 왜적의 간계와 원균의 모함으로옥살이를 하고 백의종군을 하였다.

수군재건을 위하여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되고,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상대하여

명량대첩을 이루었으며, 1598년 노량에서 왜군과 격전을 벌이는 도중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개정판 교감완역 난중일기는 현재 여해고전연구소장으로 활동하는 순천향대 교수를

역임한 노승석님이 완역한 것으로, 2013년 세계문화유산 등재시 자문위원을 맡으셨다.

1955년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난중일기, 1968년 이은상이

번역한 것과 고상안의 <태촌집>, 정탁, 배흥립, 한효순의 기록을 참조하여 완역하였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정조 때 초고본을 해독하여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할 당시

윤행임, 유득공에 의해 붙여진 것이고, 원래는 연도별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을미일기, 병신일기, 무술일기란 이름으로 분책되어 있으며, 주로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내용과 처형한 사건, 공문을 발송한 일, 장계를 올린 일 등에 관한 것이다.


임진년(1592년)정월 1일 부터 전사한 무술년(1598년)11월 17일 까지 쓴 일기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록을 하였는데, 어머니의 안부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전장터에 나선 무인이었지만, 항상 정서적 감정을 지닌 선비같은 글도 많았다.

밤이 깊은데 해의 피리 소리와 영수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들었던 내용도 있었다.


이 날 저녁 바다의 달빛이 배에 가득 하고 홀로 앉아 이리 저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P132)  바다의 달빛이 맑고 상쾌하여 자려해도 잘 수가 없었다.(P.192)

빗발이 삼대 같아서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p224) 저녁 달빛은 비단 같고 나그네 회포는 만 갈래라 잠들지 못하였다(P385)


어머니에 대한 효성 지극한 마음으로 항상 어머니의 안부를 걱정하였으며,  아들에 대한

자애로운 아버지의 마음도 엿볼 수 있었으나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없어 아쉬었다.

그 당시 남자들은 아내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금기시하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내에

대한 애틋한 정이 없었을까? 다만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였다는 내용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토, 일요일에 근무를 쉬는게 아니라 나라의 선대 임금의 제삿날이나

집안의 제삿날이나 부모님의 생일날 근무를 나가지 않은 듯 하였는데 전쟁터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일을 챙겨 드리지 못하여 몹시 안타까워 하였던 내용이 많았다.

전장터의 군사들뿐만 아니라 피난생활을 하는 백성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엿 볼 수 있었다.


내가 여지껏 가졌던 권장한 체격을 가진 이순신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자주 병고에 시달렸다.

식은 땀을 많이 흘리기도 하였고 곽란을 만나 고생하기도 하였으며 통증이 심하여 잠이루지

못하기도 하였고, 크게 취하여 밤새도록 토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고통스러웠다.

밤새도록 앉은 채 않았다. 봄기운이 사람을 노곤하게 하였다는 내용의 일기도 있었다.


정유년 가토 기요마사가 온다는 허위정보에 출동하지 않은 것을 서인과 대간들이 반역죄로

몰아갔고 원균의 모함으로 옥중에 갇힌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분하고 원통하였을까?

다행히 특사를 받아 백의종군하였지만 모친상을 당하고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출정하였다.

삼군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지만 마음에 남은 원망은 남아 있지 않았을까?....추측해 보았다.


그 해 10월 왜적들이 명량해전에 대한 보복으로 아산 고향을 방화하고 이를 대항하였던

셋째 아들 면이 전사를 하였는데, 가장 애착을 하였던 아들이었으니 얼마나 애통하였을까?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아들 또래의 왜군이 잡혀 온 것을 보고 숨어서 울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나도 괜스레 가슴이 벅차 올라 책을 덮고 흐느껴 울었던 기억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순신은 선조의 신뢰를 잃고 많이 괴로워하였던 장면이 많았다.

전쟁을 당한 백성들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왕이나 대신들보다 자신들을 돌보아주는

이순신을 더 따르고 존경하였을 것인데 그런 것도 왕에게는 못마땅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전장터에 나가 스스로 죽을을 택하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국력이 분열되고 약한 나라는 항상 외침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명나라의 원군이 왔지만 자신의 나라도 아닌데 목숨을 걸고 싸울 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무력의 야욕을 키우기 위해 조선을 침입하여 숱한 군사와 백성의 목숨을 앗아간 일본에 대한

미움이 커졌으며, 스스로 나라의 힘을 키워 외세의 침입을 받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난중일기의 표지.


난중일기 앞 날개.


이석희님의 자필 사인이 있는 책.


이순신의 영정.


난중일기의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