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편
- 문 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얼마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던 문정희시인의 시다.
어제는 딸 아라도 캠프 떠나고 혼자 남게 되었다.
년말 년초, 저녁마다 얼굴 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남편이었기에
오늘 저녁부터 혼자서 저녁을 먹어야 겠구나.....
유난히 저녁 무렵이면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나였기에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 좀 치고 저녁먹고, 그다음은 음악 들으며 책이나 읽을까?...
'루이스 호수'를 치고 있는데 남편이 문을 따고 들어섰다.
"어머나...웬일?"
혼자 있을 마누라 생각하여 모든 것 다 뿌리치고 돌아왔단다.
늦는다고 투정을 하면서도 막상 저녁상 차리는 것 귀찮아 하는 나.
속으로는 저녁은 먹고 와도 좋은데....
남편은 밥통속에 넣어둔 밥은 싫어하고 갓지은 돌솥밥을 좋하하므로
얼른 쌀을 씻어 밥솥에 앉히고, 김치찌개도 만들었다.
"여보, 당신과 영화 본지가 언제였을까?
'킹콩'은 남자와 보는 게 좋다고 하던데 어때요?"
하였더니 의외로 순순히 일어나 주었다.
소한의 추위가 옷깃을 파고 들었다.
남편은 내심 TV나 보면서 쉬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아침에 혼자서 영화를 한편 먼저 보았기에
하루에 두편의 영화를 보는셈인데
시치미 뚝 떼고 있었다.
워낙 영화보는 것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므로 혼자 영화관 다니는 것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내 체면에 두개나 본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커플좌석에 앉아 보았다.
영화 상영하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이건 전혀 내 취향이 아닌 영화였다.
어느 정도 내 취향을 알만한 사람이 어째서 남편과 함께 볼 것을
권하였을까?
곁에 앉은 남편에게 미안스러워 나가자는 소리도 못하고
반은 꾸벅꾸벅 졸면서, 그래도 무언가 기대하면서 보았다.
이건 순전히 몇십년전의 '타잔'영화였다.
거의 반나의 여인이 야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고 하더니, 나중에는 애정까지 느끼는 것 같았다(?)
밀림에서의 야수와의 대결만으로 끝낼 수도 있는 영화를 왜 미국 번화가에
까지 끌고 들어갔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내 상상력이 요즘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일까?
미안해 하는 나를 보고
"제목만 들으면 알아야지. 오래만의 당신 청을 거절 못해서
하는 수 없이 따라갔다"고 하는게 아닌가?
솔직히 나는 남편의곁에서도 항상 멋진 남성과의 로맨스를 꿈꾸고 있는데,
이런 심정은 내 남편도 마찬가지로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편안하게 대해주는 남자는
역시 내 남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의 팔짱을 꼭 끼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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