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남미 43일 배낭 여행-끝. 굿바이. 남미

푸른비3 2024. 8. 3. 11:17

2015.11.16.월~18. 수.

 

성당 아래로 내려가니 바로 지하철역이었다.

우리는 어제 찾아갔던 한인 식당에서 마지막 만찬을 하기로 하였다.

상파울로에는 일본인 마을에 비하여 한인촌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물어물어 찾아간 식당에서 따뜻한 육개장을 먹으니 몸도 마음도 훈훈해졌다.

식사 후 주변의 한인 마을을 둘러 보았는데 서울의 동대문시장과 비슷하였다.

이곳에서 한국인은 주로 의류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대부분 성공을 한 듯.

몇 년 전 이곳을 드나들며 사업을 하였다는 내 친구도 생각났다.

내가 좋아하는 화려한 레이스가 많아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운반하기 힘들어 참았다.

 

중남미로 이주한 최초의 한인는 1905년 계약노동자로 멕시코로 이주한 사람들.

그 다음에 이주한 사람들은 625 전쟁 후 중립국을 택한 전쟁포로라고 하였다.

본격적인 이민이 시행된 것은 1960년 이후 이민 바람의 영향이 컸다고 하였다.

그 머나먼 땅에 정착하여 사는 이민들은 또 다른 애국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기나긴 여정이 끝나고 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미국 달라스 공항을 거쳐 한국에 도착하는 이동시간은 거의 이틀이 걸렸다.

달라스 공항에서 문제의 스틱은 안전한 방법으로 따로 이송시켜 주었다.

역시 아메리카 에어라인, 선진국 항공은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티켓팅을 하면서 분명히 창가의 좌석을 부탁하였는데 어찌된 상황인지,

내 좌석은 가운데 좌석이었고, 게다가 이륙 직전, 화장실에 이상이 생겨

두시간을 꼼짝 못하고 갇혀있다가 드디어 인천을 향해 출발하였다.

 

잠들지 못하는 20시간을 버터 내는 것은 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하였다.

기나긴 여행 일정들이 스펙트럼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장엄한 자연 앞에서 하느님의 위대함을 느꼈고 나 자신의 미미함을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엄살을 떨면서 살았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았는가?

자연에 순응하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여유롭게 사는 이곳 사람들이 떠 올랐다.

 

처음 여행 계획을 세웠던 때와는 달리

막상 여러 사람들이 함께 여행하는 것은 어려웠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 보다, 사람 관계를 매끄럽게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개성이 다르고 취향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긴 여행을 하는 것이 쉽겠는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나를 힘들게 하였던 것이 바로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긴 비행 끝에 인천공항에 착륙하니 저절로 손뼉을 치며 환호성이 터졌다.

평소에 서울의 매캐하게 여겨지던 매연도 구수하고 달콤하기까지 한 이유는 뭘까?

차창으로 보이는 한국의 가을은 안데스 산의 녹갈색 능선처럼 아름다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한 알 한 알 묵주를 굴리면서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지하철 역 안의 벽화

 

한인 마을.

 

한인 마을의 친절한 상인들.

달라스 공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