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관통한다는 태풍 제 6호 카눈이 오늘 오전 6시를 기해
평양에서 소멸되었다고 하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어제 오전 마산에 사는 아들에게 전화하니 도로가 침수되어
집에서 손자들과 함께 도로가 복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실시간 전해지는 뉴스를 보니 사방에서 물난리가 일어나
주민들이 대피하는 모습을 보니 지나간 유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반도는 위치상 태풍이 자주 일어나는 곳인 모양이다.
어린 시절에도 여름이 끝날 무렵이며 늘 태풍이 찾아왔다.
태풍은 언제나 많은 피해를 가져오는 홍수와 함께 찾아왔다.
바람이 잠잠해지고 햇빛이 나오면 우리는 가까운 둑으로 갔다.
벌건 황토물이 성난 황소처럼 솟구치며 흐르고 그 황토물 위로
솥단지, 주전자 등 가재도구도 둥둥 떠서 거침없이 흘려 내려갔다.
우리는 위험한 줄도 모르고 제방위로 찰랑이는 물살을 따라
달리기도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위험한 놀이였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는 성당 뒤 대나무밭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낮에도 어둡고 냉기가 있어서 평소에는 잘 가지 않았다.
늘 스스슥 가늘고 긴 댓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대나무 밭에는
아름드리 호두나무가 대여섯 그루 우람하게 서 있었는데,
가지가 높아 조무라기 우리들의 손에는 닿지 않았다.
고소한 호두를 먹고 싶었지만 땅에 떨어지기 전에는 그림의 떡이었다.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대나무밭에는 연두빛 탁구공만한 호두가
지천으로 떨어져 우리는 손이 까맣게 물드는 줄도 모르고
어머니가 만들어 준 꽃무늬 포플린 치마에 한 가득 담고 킬킬거리며
밖으로 나와 신나게 껍질을 벗기고 단단한 알맹이를 골라 담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옷에 검게 물든 것을 야단쳤지만
우리는 그 여리고 고소한 호두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어린 우리의 손바닥은 오래동안 검은 물이 배였고, 언니가 손톱에 물들여 준
봉숭아 주황빛 꽃물이 희미해지면 여름방학은 서서히 끝나갔다.
추석이 가까울 무렵 찾아 온 태풍은 농가인 우리 집의 큰 걱정이었다.
한 해의 고단한 농사일을 끝내고 추수를 기다릴 무렵 태풍이 오면
부모님의 걱정하는 한숨소리가 어린 내 마음까지 어둡게 하였다.
철없는 나는 어른이 되어도 절대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농사는 사람의 정성과 노력도 필요하지만 자연의 도움이 없으면
안되는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것이 안타까워 하늘을 원망하기까지 하였던
나에게 아버지는 농사는 반만 거두면 감사한 일이라고 하셨다.
한반도의 가운데를 관통한 태풍 카눈은 소멸하였지만,
아직 카눈의 여파로 나무가 흔들리고 빗방울이 떨어진다.
집앞의 한강물이 넘칠듯이 흐르지만 더 이상 태풍의 피해가 없기를
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