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절없이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한 해의 끝무렵 12월이다.
그동안 특별한 이변없는 무난한 삶을 살았는데
지난 주부터 감기기운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가라 앉았다.
새벽에 눈을 뜨면 똑 같은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중단된 미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성당에서 미사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도 생각하였는데,
평일 새벽 미사에 참례하는게 부담스럽게 여겨졌고
스스로 시작한 <9일 기도> 드리는 것도 벅차게만 느껴졌다.
물먹은 솜처럼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어제 아침 딸에게 부탁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티켓을 예매하였다.
(바보스럽게도 나는 아직 인터넷 쇼핑을 할 줄 모른다)
예약된 오후 2시에 박물관으로 들어가 외투와 가방을 사물함에 넣었다.
평소에 눈썰미가 없지만 감각은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하여
사물함의 위치와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비밀번호를 설정한 후
합스부르크 걸작을 전시하는 특별전시관으로 들어 갔다.
평일 오후인데도 합스부르크의 걸작을 감상하려 온 관객으로
전시장안은 혼잡하여 이름난 작품 앞에서는 순서를 기다리며
그림을 감상하여야 하였으므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5시 가까운 시간에 전시장을 나와 사물함 앞으로 다가 갔다.
그런데 내가 짐작하였던 사물함에서 비밀번호를 넣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고 갑자기 당황하고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오른 쪽 끝부분 내 키 높이의 사물함이었는데?
주변의 몇 개의 사물함을 눌려 보아도 여전히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내소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자 직원이 나와서 함께
주변의 사물함을 뒤적여 보았으나 전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들처럼>
"열려라, 참깨~!" 주문이라도 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물관 직원은 마스터 키를 가지고 있으니 모두 열어 볼 수는
있겠지만, 남의 사물함을 모두 열어 볼 수는 없는 형편이라
박물관이 문을 닫는 오후 6시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기다리는 동안 또 다른 특별전시 <외규장각 의궤>를 보았다.
드디어 6시 다시 사물함에 가서 문을 열어 보았으나
내가 감각적으로 추정한 곳들의 사물함을 모두 비워 있었다.
갑자기 내가 무슨 꿈이라도 꾸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옆에 있는 직원에게 거짓말이라도 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하였다.
더 이상 내 감각을 믿을 수 없어 아직 개방되지 않은 문이라도
검색해 봐야 겠다는 생각으로 가운데 위치에 있는 그것도
반쯤 앉은 자세로 열어야 하는 사물함 앞에서 비밀번호를 눌렸더니,
스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세상에나?. ...이 위치는 전혀 내 감각하고는 일치가 되지 않는데?
언제 내가 이곳에 와서 이런 앉은 자세로 사물함에 넣었던가?
이제는 나 스스로의 감각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구나 생각하니 한심스러웠다.
집에 와서 딸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엄마 치매 검사 받아봐야 하는 것 아냐?"
(어제 나를 도와준 특별 전시관의 젊은 직원에게,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여 사과하였더니
"그럴 수도 있다....."고 바보같은 할머니인 나를 위로해 준 그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탐스럽게 떠 있는 하얀 구름.
박물관 건물 사이로 보이는 남사 타워.
6시 넘은 시각.
어둠이 덮히기 시작한 박물관 위로 떠 오른 휘영청 밝은 달.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름달과 화성 (0) | 2022.12.09 |
---|---|
2022 제 10회 광진예술인의 밤, 제 5회 광진예술상 시상식 (0) | 2022.12.08 |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0) | 2022.12.07 |
인형놀이 (0) | 2022.11.22 |
솔뫼성지 (0) | 2022.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