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의 탄생
손영옥 지음
푸른역사 (2020. 4. 초판)
(2020. 8.8~14)
지난 7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새 보물 납시었네'를 감상하고 온 후
집 앞 자양한강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빌려 왔다.
작가 손영옥은 미술 시장 및 제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고 연구하며
비평으로 영역을 넓혀 국내외의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20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으로 당선되었다고 하였다.
'책을 펴내며' 에서 작가는 마흔이 넘어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서 걸렉터에 마음이 사로 잡혀 석사와 박사학위 논문을 썼으며,
한폭의 한국사. 조선의 그림수집가들 아무래도 그림을 사야겠습니다 등을 썼다.
이 책은 한국에서 근대 미술시장이 탄생하는 과정을 경제, 사회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였으며
근대사의 이면을 미술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 보는 기분이 들 것이다로 하였다.
서양인에게 조선은 '은둔의 나라'였고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개항지와 대도시에는 외교관, 선교사, 의사, 사업가 등
여러 목적으로 온 외국인에 의해서 쇄국의 빗장이 열렸다.
"모든 재화는 상품으로 생산되어 수급 논리에 따라 시장에서 화폐가치로 교환된다.
시장경제하에서 시장에서 결졍된 가격이 시장 주체에게 참여 동기를 부여해
제도적 창안과 혁신, 기술의 진보를 이루어가는 동인이 된다. (중략)
이를 미술시장에 대입하면, 자유경쟁하에서 화가들이 수요자의 취향과
구입 목적을 염두에 두고 상품으로서 미술품을 제작. 판매하는 방식이 주류가 될 때가
근대적 미술시장의 출발기다"(p16) 라고 서두에 적어 놓았다.
한국 미술시장에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는 개항기였으며
한국 최고의 고미술품으로 인정받는 고려청자의 발견도 이때 이뤄졌으며
갤러리의 전신인 지전, 서화관 등의 모습도 이때 드러났다고 하였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나눠서 전개되었는데
1부 개항기(1876~1904년)
2부 일제 문화통치 이전(1905~1919년)
3부 문화통치시대 (1920년대)
4부 모던의 시대(1930~해방 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호를 개방하자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독일인 묄렌도르프,
독일 주재 첫 조선국총영사로 임명된 마이어,
미국 선교사 앨런 등 모두 대표적인 걸렉터였다.
그들은 조선의 민속품, 미술품을 구입하여 고국으로 보냈으며 그곳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조선시대의 풍속화는 사진이 없었던 조선의 생활상과 풍습을 알게하는 중요한 자료였고,
서구인들의 수요에 의하여 김준호, 김윤보, 한진우, 문혜산 등 수출화가가 배출되었다.
이런 수출화가가 배출되기 이전 조선 후기의 윤두서, 조영석은 풍속화의 개척자이며
정조 시대의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은 풍속화의 절정을 이루었다.
청나라와의 교류에 의하여 새와 짐승을 그린 영모화가 유행하였으며
장승업의 화풍은 안중식, 조석진에게 계승되었고 김규진과 함께 일제강점기의3대 화가라고 불렸다.
장승업이 유명해지자 1890년대 광통교 일대에 '육교화방'을 차리고 부유층의 주문그림을 제작하였다.
대동서시. 고제홍서사. 박물서관. 보급서관 등 서점에서도 책과 함께 서화를 판매하였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사이에 고려 청자 애호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 청자 애호가 였으며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시타케는 조선서화 수집이 취미였다.
고려자기는 고려 불화와 함께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고려시대의 미술품이다.
고려자기는 고려 고분 안에 시신과 함께 묻혀 있던 기물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제작 기법 자체가 전수되지 못하여 조선시대에는 예술품으로 향유되지 못하였다.
개항과 더불어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은 일본인 호사가보다 20~30년 앞서 주목하였다.
서양의 수집가에 의하여 고려자기와 아미타불 지장보살도 등 불화가 해외로 흘러나갔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도 왕을 중심으로 서화를 수집하고 수장고를 갖추었지만
박물관이라는 제도적 기구를 통하여 연구와 전시를 목적으로 미술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한 것은 한일합방후 생긴 이왕가박물관(1908년). 조선총독부박물관(1915년)이었다.
고려청자는 그동안 무덤 부장품으로 존재하다가 박물관에 의해 미술품이라는 지위를 받았다.
일본인 수집상이 대부분이었던 미술 시장에 최봉운. 김원만. 박순응 등 한국인 미술상이 등장하였다.
1920년 대 문화통치시대에 고려청자의 대체재로 조선백자가 등장하였다.
조선백자의 미적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아사카와 형제였으며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2년 출판한 <조선의 예술>에서 조선의 백자를 '비애의 미'로 해석하였다.
전람회 시대의 개막에서
조선미술전람회(조선총독부 주관). 서화협회 전람회(민간서화단체 연합 주최)가 개최되었으며
조선미전 입선 경력은 화단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인성. 김인성. 심형구. 김중현. 정현웅, 김종태. 나혜석. 김용근. 선우담. 박영선은
조선미전 출신의 10대 서양화가였다.
한국인 1호 서양화가는 1915년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고희동이었으며,
프랑스 유학을 다녀 온 나혜석은 1921년 한국인 최초로 서양화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최창학은 금광 투자에서 얻은 수익을 기반삼아 고미술품 수집을 하였으며,
외과의사이며 골동품 수집가 박병래.
전문 미술품 중개인 오봉빈. 재산가 전형필들이 활동하였다.
오봉빈이 운영한 조선미술관은 본격적인 화랑이었다.
'테일러 무역상회'는 외국인이 운영하는 고미술품 유통공간이 있었다.
우리의 문화재가 외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전형필은 오세창의 권유로
고서 전문취급하는 한남서림을 통하여 미술품을 수집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보화각' -현 간송미술관의 모태. 이라는 사립미술관을
1938년 성북동에 설립하여 문화재 지킴이가 되었다.
근대적 화랑 백화점인 갤러리의 등장은 녹향회. 백만회 등을 통하여
1930년대부터 상업미술의 시대적 요구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미스코시백화점,
화신 백화점 등에 갤러리가 열렸으며 다방. 카페가 서양화 전시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933년 덕수궁 석조전, 1936년 석조전 신관이 개관하여 전시회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평소에 그림을 좋아하여 이 책을 읽기 시작하였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을 구입을 여력도 없고
내게 너무 전문적인 분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책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미술시장의 탄생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즐거웠다.
미술시장의 탄생
지은이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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