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동지 팥죽

푸른비3 2018. 12. 21. 19:14

내일이 24절기 중 22번 째에 해당하는 동짓날이다.

일년 중 해의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기도 하다.

낮의 길이가 가장 짧지만 동지가 지나면 낮이 매일 조금씩 길어지니

초저녁부터 어둑어둑 어둠이 덮혀도 어쩐지 희망적인 기분이 드는 날이다.


나는 해의 길이가 짧아지는 추분이 지나면 괜스레 마음이 우울해진다.

아무 한 일도 없이 그냥 한 해가 끝나 버리는 것 같아 조바심도 생긴다.

서늘한 바람에 목덜미가 선뜩해지고 푸르던 나무들이 바스락거리기 시작하면

멀리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얼굴을 파묻고 펑펑 울고 싶어지기도 한다.


기온이 점점 떨어지고 나무들이 황홀한 빛깔로 물드는 모습을 보면

나도 저 단풍처럼 내 인생의 마지막을 곱게 물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뭇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어느새 새봄을 예약하는 새순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부터는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도 담담한 모습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추분이 지나고 나면 찬이슬이 내린다는 한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 땅이 얼기 시작한다는 소설. 눈이 많이 내린다는 대설이

지나는 동안 점점 추위에 익숙해지고 마음을 단단히 하여 겨울을 채비하게 된다.

소한. 대한 등 큰 추위가 남았지만 동지를 지나면 벌써 마음은 봄이 자리잡는다.


먹을게 궁하였던 내 어린 시절에는 겨울이 되면  손꼽아 동짓날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가마솥에 팥을 삶아 팥을 거피하여 앙금을 앉혔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앞에 앉아 찹쌀가루를 익반죽하여 새알심을 만들었다.

서로 자기가 만든 새알심이 더 잘 만들었다고 쌀가루 묻은 손을 내밀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커다란 가마솥이 넘치도록 물을 부어 기다란 나무주걱으로 저으면

부엌에 하얀 김이 서리고 부글부글 팥죽이 끓어 오르면 마치 잔치집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남몰래 구멍이 숭숭 뚫린 뒤간에 앉아 엉덩방아를 찧으며 즐거워하였다.

곧 성탄절이 돌아오고 떡국을 먹을 수 있는 설날이 다가오는 겨울이 즐겁기만 하였다.


팥죽이 익으면 어머니는 커다란 양푼이마다 가득 죽을 담아 장독대위에 올려 놓았다.

붉은 팥죽이 악귀를 쫒는다고 히여 대문이며 문설주와 기둥에도 죽을 슬쩍 뿌리셨다.

우리는 한밤에도 장독대로 나가 대야에 담아 놓은 팥죽의 방으로 가져와서 먹었는데

팥죽이 식으면서 생긴 두텁게 덮힌 팥죽의 껍질을 서로 먹겠다고 다투기도 하였다. 


그때는 왜 그리도 추었는지 어느새 살얼음이 살짝 잡힌 팥죽은 요즘의 아이스크림같았다.

팥죽에 든 새알심을 헤아리며 서로 나이 더 먹는게 좋다면서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고는

추위에 이를 딱딱 부딪히며 아랫목으로 들어가 이불을 돌돌 말며 서로 장난치곤 하였다.

난방이 잘된 아파트에 사는 요즘 아이들은 그런 팥죽먹던 아랫목의 추억을 알고 있을까?


성인이 되고 난 후 그런 세시풍속들이 번거롭게 귀찮아 그냥 모른척 넘겼는데

요즘은 오히려 그런 세시풍습을 찾게 되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늙었나 보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에서 그런 세시풍습을 지키면서 한 해의 매듭을 짓고 싶다.

내일이 동지이니 오늘 팥을 삶고 찹쌀도 물에 불려 곱게 갈아 팥죽을 끓여야지.


   *       *       *      *

동지날이면 생각나는 황진이의 시 한수 읊으면서.....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뎌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