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시립 월전미술관 개관전시작 <월전, 그 격조의 울림> 이천에 오시면...
2007/09/29 03:32 |
나는 자부한다, 일생을 바르게 살고 신의를 존중했음을
달을 사랑한 예술가이자 탁월한 교육자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005)
월전 장우성 선생은 동양고유의 정신과 격조를 계승하며 현대적 조형기법을 조화시킨 ‘신문인화’의 회화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근대적 화풍을 이룩하며 해방 이후 새로운 미술의 형성과 발전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월전은 특히 시서화(詩書畵)를 온전히 갖추어 전통문인화의 높고 깊은 세계를 내적 외적으로 일치시킨 경지에 이른 현대 화단의 마지막 문인화가로 추앙되고 있다.
뛰어난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교육자였던 그는 1946년 창설시기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몸담았으며, 1960년대 후반부터는 홍익대학교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했다. 현재 한국 동양화단을 이끄는 중진작가 대부분이 월전의 제자들이라 할 수 있다.
만년에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해 평생의 업적을 공익화한 그는 월전미술관 ‘한벽원(寒碧園)’을 건립하고, 월전미술상을 제정했으며, 동방예술연구회를 통해 원로 석학들의 동양철학사상 및 미술정신 강좌를 마련했다. 소멸돼가는 동양고유의 사상과 정서를 재조명하고 그 가치를 인식함으로써 진정한 한국미술의 창조를 촉진시키기 위한 이 강좌 성과 또한 매년 문집 『한벽문총(寒碧文叢)』으로 발간했다.
9회의 국내 개인전 및 5회의 해외초청전시회를 통해 한국화의 참모습을 국내 및 국제무대에 펼쳐 보인 그의 작품 가운데 많은 작품이 국내외 주요기관에 소장돼 있다.
주요작품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현충사 소장), <백두산 천지도>(국회의사당),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성화 3부작(바티칸 교황청박물관), <취우(驟雨)>(새마을금고 연합회), <노묘(怒猫>(이천시립월전미술관), <화실>(삼성미술관 리움), <새안(塞雁)>(대영박물관), <홍매>(프랑스 문화성), <회고>(독일 쾰른 시립박물관), <심청도>(일본 후지미술관), <청년도>(서울대학교미술관), <군록도>(고려대학교박물관), <금강산도>(서강대학교박물관)를 비롯해 인물화, 산수화, 화조, 영모 등 다수가 있다.
생애를 통해 문화예술계에 끼친 그의 공로는 서울시문화상(1959), 예술원상(1971), 5ㆍ16민족상(1972) 등의 수상으로 널리 인정받았으며, 2001년엔 금관문화훈장 수훈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저서로는 수상록 『화실수상』, 회고록 『화단풍상70년』등이 있다.
개관식에서 제자로 답사에 나선 이종상 화백은 4.19 직후 입학한 서울미대 첫 강의에서 “그림에는 지름길이 없다”며 회사후소(繪事後素) 즉 ‘사람이 먼저 된 후라야 그림이 된다’고 강조하던 선생의 인상적인 모습을 추억한 뒤, 시대의 선구자요 한국화단의 사표로서 제자와 후배작가들에게 항상 ‘손끝의 재주만 믿지 말고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라’며 고뇌하고 사색하는 화가가 되도록 일깨웠음을 털어놔 따뜻하면서도 엄격했던 선생의 고매한 정신적 면모를 짐작케 했다.
재밌어라, 나는야 그림의 종놈
화노(畵奴)
오창석 인보에 화노란 전각이 있는데,
임백년 화백을 위하여 새긴 것이다.
임씨가 화명이 높아서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몰려 밤낮 없이 그림을 그리다가 마침내 지쳐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그림의 종놈이라고 한데서 생긴 말이다. 이 말이 재미있어 한번 써본 것이다.
缶盧印存中有畵奴者爲任伯年刻也 任氏以畵名求之者成市 日夜勤苦 因自嘲曰畵奴 所謂功者拙之奴也 篆法絶妙 印文特異 欣賞之餘 書此自娛
장우성, 화노(畵奴), 49x82.5cm, 종이에 수묵, 1999
아슬아슬, 2003, 41x63.5cm, 종이에 수묵
명추(鳴秋), 1998, 종이에 수묵, 34x46.5cm
명추(鳴秋)
한 발(簾)의 가을생각을 풀벌레가 아는구나.
一簾秋思後蟲知
탄생에 대한 예언과 월전(月田)의 유래
그렇다면 일생을 기꺼이 그림에 사로잡혔던 월전의 호는 어떻게 지어진 것일까. 먼저 풍수지리에 근거한 월전 출생의 예언부터 알아보자.
월전은 『화단풍상70년』이란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출생이 예언됐음을 밝히고 있다.
국권을 잃고 앞날이 암담한 현실에서 뜻있는 인사들이 풍수지리에 기댐은 차라리 적극적인 수신(修身)책이기도 했다. 그가 두 살 때 가문이 원적산 기슭인 여주 흥천 외사리로 이주해온 연유도 바로 금반형지(金盤形地)인 고래(古來)의 명당터를 찾음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월전이 태어나기 전, 안산(案山)이 단양 옥순봉인 금수산 기슭으로 할머니 산소를 이장할 당시 이름난 지사(地師)가 10년쯤 후 훌륭한 화가 자손이 태어날 것을 예언했다고 하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하간 일본 풍습인 단발에 반대해 머리를 못 자르게 함은 물론 일본놈이 세웠다하여 학교조차 못 가게 할 정도로 배일사상이 강했던 월전의 집안 어른들은 그가 문장명필(文章名筆)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월전은 어려서부터 글공부 외에도 이상할 만큼 그림에 흥미를 갖고 빠져들어 사군자며 문인화를 곧잘 모사해 주위의 칭찬을 들었다. 집안 내력에도 없는 그의 그림에 대한 취향에 지사의 예언을 참작했음인지 그가 19세 되던 해 부친은 그림 공부를 허락했다.
이당(以堂) 김은호 선생의 문하에 들기 위해 서울로 떠나던 날 아버지는 나중에 훌륭한 화가가 되면 쓰라며 그에게 호를 지어줬다. 달을 좋아하는 그의 천성과 고향 마을 이름 사전(絲田, 외사리 사전부락)에서 한 자씩 딴 ‘월전(月田)’엔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 자연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수선(水仙), 1990, 종이에 채색, 17x34cm
수선(水仙)
기화요초(신선세계의 화초)나 친구가 될까?
울긋불긋 보통꽃과는 거리가 멀다.
琪花瑤草堪爲侶 不入千紅萬紫中
1999_공수래공수거(34x137)_1999作.
월전 장우성 연보
1912. 6.22 충주(忠州)에서 출생, 3세 때 경기도 여주(驪州)로 일가 이주.
1932~40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사사.
1941~44 조선미술전람회(鮮展) 연속 4회 특선(총독상 1회, 창덕궁상 2회).
1944 선전(鮮展) 추천작가.
1946~61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49 바티칸 국제성(聖)미술전에 한국대표로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 3부작 출품.
1949~76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1950 제1회 개인전.
1959 서울시문화상 수상.
1960 대한민국 홍조소성훈장 수훈.
1964 미국 국무성 초청 개인전.
1965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 설립.
1970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70~76 국전 운영위원 역임.
1971 예술원상 수상.
1971~74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72 5・16 민족상 수상.
1973 일본 동경 마쓰야화랑(松屋畵廊) 개인전. 예술원 아시아 예술 심포지엄 한국대표.
1974 대한민국 홍조근정훈장 수훈.
1976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장 수훈.
1980 프랑스 정부 초청, 파리 세르누스키 박물관 초대전.
1982 독일 쾰른 시립동양박물관 초대전.
1985 국립현대미술관 원로작가 초대전.
1988 일본 세이부미술관(西武美術館) 초대전.
1989 월전미술문화재단 설립, 이사장 취임.
1991 월전미술관 「한벽원(寒碧園)」 신축 개관. 제1회 월전미술상 시상.
1994 월전회고80년전(月田回顧八十年展) -호암갤러리 초대전.
1995 원광대학교 명예철학박사. 제1회 의재(毅齋) 허백련 미술상 수상 . 제9회 춘강예술상 수상.
애서가상(愛書家賞) 수상.
1999 미수기념전(米壽紀念展).
2001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수훈. 구순기념전(九旬紀念展).
2003 한중대가 : 장우성 ・ 리커란(李可染)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 초대전.
2005 예술원 원로회원, 경기도민회 고문.
2005. 2. 28 서거.
붓인들 아니 그리우리, 월전기념관
미술관의 작품을 다 본 뒤엔 위쪽의 월전기념관으로 발길을 향해본다. 월전기념관은 월전 장우성 선생 생전의 마지막 작업실을 원형에 가깝게 재현해 미술관 위쪽에 축소 건립했다.
1991년 서울 팔판동에 월전미술관을 개관한 때부터 2005년 서거하기까지〈오염지대〉,〈태풍경보〉,〈산불〉,〈호가호위〉,〈황소개구리〉,〈단군자손일백오십대손〉,〈초보운전〉 등 15년 동안 그려낸 수많은 시사 풍자 작품의 산실이며 만년 수작의 제작실을 원형에 가깝게 재현했다.
월전기념관에 재현된 작업실.
지필연(紙筆硯)이 조각된 월전기념관 앞뜰.
기념관 앞뜰에는 노대가를 상징하는 조각공원을 조성했다. 긴 세월 월전예술의 숨결을 이어가는 본류로 삼기 위해 월전화사 78세 상(月田畵師七十八歲像)을 흉상으로 안치하고, 미수(米壽)와 구순(九旬)에 이르도록 붓을 놓지 않으며 화필과 더불어 평생을 살아온 예술혼을 상징하고자 종이와 붓과 벼루, 지필연(紙筆硯)을 조각해 전면에 배치했다. 좌우에 화비(畵碑)와 서비(書碑), 입구 우측에 연보비(年譜碑)를 설치하고 난간석을 둘러 마감했다.
화비에는 “문인화의 백미(白眉)”라는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월전 선생 스스로도 가장 아끼던 그림 중 하나인〈가을밤의 기러기 소리〉(1998년 작)를 새겼고, 서비에는 자신의 일생을 “그림에 사로잡힌” 이라는 뜻의 두 글자로 압축해 일필휘지함으로써 만인에게 경외와 감동을 불러일으켰던〈화노(畵奴)〉(1999년 작)를 새겼다. 이 화비와 서비는 월전 선생의 학처럼 단아하고 물 흐르듯 담담한, 그러나 치열한 예술혼으로 사신 평생을 상징한다. 아울러 생을 마감하기 직전 후학들에게 남긴 “손끝의 재주에 안주하지 말고, 사색하고 고뇌한 끝에 얻어지는 작품이라야 예술성을 부여받을 수 있음을 명심하라”는 유지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 푸른산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