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27. 일
오후 3시에 딸과 함께 집을 출발하였다.
그동안 겨울보다 매서운 한파로 밖에 나서기도 두려웠는데,
오늘은 모처럼 포근하여 아라와 함께 걸어서 병원으로 갔다.
집을 나서기 전,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리고 집안을 정리하였다.
수술을 앞두고 긴장한 탓으로 며칠 째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오늘도 초저녁 한 숨 자고 나니 잠이 오지 않아
그냥 잠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켜고 9일 기도를 드렸다.
내 마음이 간절하니 저절로 기도에 매달리게 된다.
집을 나서기 전 다시 한번 성모상에 고개를 숙이고
남편의 영정 사진도 쓰다듬으며 잘 다녀올께....인사를 하였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속에 봄의 기운이 느껴졌다.
산수유 나무 가지끝이 어느덧 봉굿 부풀어 올랐다.
4시까지 입원 수속을 받아라고 하여 시간에 맞춰 갔더니
입원 수속 창구앞에 많은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나처럼 조금이라도 더 늦게 입원실로 들어가고 싶었을까?
번호표를 뽑아 순서를 기다렸다.
창구에는 한 사람의 직원이 많은 환자를 상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직원은 모든 환자들에게 일일이 똑 같은 설명을 하고 있었다.
고객을 대하는 태도는 친절하였으나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이렇게 고객이 많을때는 직원을 한 명 더 배치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3시 40분에 도착하였으나 30분을 기다려도 내 순서가 되지 않았다.
4시 안에 입원 수속을 끝내려고 하였는데 4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산부인과 간호실에서 입원수속을 했느냐고 전화가 왔다.
지금 기다리고 있는데 한꺼번에 많은 환자가 밀려와 늦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드디어 수속을 끝내고 오후 5시, 5층 여성병동으로 올라갔다.
아라는 상주 보호자 명찰을 목에 걸고 나는 환자 팔찌를 차고 들어갔다.
요즘은 코로나로 병문안은 절대 금지이며 보호자도 코로나 PCR검사
음성반응을 가진 사람 1인만 가능하여 내 짐을 옮겨주고 가기로하였다.
병실은 501호. 5인실인데 내 병상은 바로 창가 앞이었다.
오후의 늦은 햇살이 가득 들어와 병상을 환하게 비춰주니 기분이 밝아졌다.
어머나. 창가로군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환자복으로 갈아 입었다.
5인실이지만 지금은 3인만 병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라는 병원에서 나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였다.
저녁 식사를 챙겨주고 가겠다고 하였지만 억지로 일찍 보냈다.
아라를 보내고 나니 친정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가 떠 올랐다.
친정 어머니 병상을 좀 더 길게 지켜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라를 보내고 마음 편하게 침대에 벌렁 드러누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부드러운 마음이 들어와 기분도 좋았다.
오늘 저녁 식사후 밤 12시부터 금식에 들어간다고 하니 그 전에는 자유로웠다.
6시에 저녁 메뉴가 나왔는데 반찬도 다양하고 입에도 맞았다.
1달 전 정형외과에 입원하였을 때와는 식단이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새해에 들어 2번이나 입원을 하였으니 무슨 얄궂은 운명인가 생각하니
마음이 우울하였지만 이것도 살아가는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였다.
아무리 긴 터널도 끝이 있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병상 머리맡에 개인용 전등 스위치가 3개. 곤센트가 2개 있었다.
밤 늦게도 침대 머리맡의 불을 켤 수 있으니 환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였다.
무엇보다도 병실에 TV가 없으니 조용하게 지낼 수 있어 좋았다.
건너편의 고층 건물의 불빛이 마치 별빛처럼 반짝이고 아름다웠다.
커튼을 내리지 않고 저 불빛이 다 사라질때 까지 바라보아야지....생각했다.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 보니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엊그제까지는 저렇게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었는데.....
이 수술이 끝나고 나도 저렇게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2022. 2. 28. 월.
불빛을 바라보다 그대로 잠이 들었던가 보다.
눈을 뜨니 이제 막 28일 새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난 밤 머리맡에 물병을 놓아두고 자주 물을 마셨더니 소변이 마려웠다.
화장실에 가서 물이 목으로 넘어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가글을 하였다.
다시 누웠더니 바로 옆 병상의 환자 코골이가 요란하였다.
입실하면서 먼저 병실에 입원하였던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며칠 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고 하였다.
계속 목에서 가래가 끓어 올라 힘들다고 하였는데 코골이가 더 심하였다.
환자 바로 옆에 불편한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도 있는데,
그래도 나는 엷은 커튼이나마 있으니 좀 낫지 않은가 생각하였다.
아플 때일수록 옆지기가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잠인 멀리 달아나고 나는 귀막이를 깊숙히 밀어 넣었다.
새벽에 담당 간호사가 와서 체온과 혈압체크를 하면서
심한 코골이 소리를 듣고, "귀막이 갖다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아니 지금 귀막이 하고 있지만 별 효과가 없어요."
잠을 이룰 수 없으니 더욱 목이 말라 자주 화장실로 가서 가글을 하였다.
저렇게 코골이가 심한 환자는 독실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괜스레 그 환자가 미워지기 시작하였다.
역지사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기로 하였다.
나 역시 저런 경우가 되어도 독실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8시에 담당 의사가 회진을 와서 불편한 곳은 없느냐고 물었다.
몇 시에 수술이 가능하느냐고 물었더니 수술 순번 3번째이므로
아마 점심 후 2~3시가 되어야 가능하다고 하셨다.
나는 합장을 하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하였다.
가능하다면 일어나 큰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모든 걸 맡기고 싶었다.
어제 밤 마산에 사는 며느리가 전화를 하여 손자 둘과 통화를 하였다.
올 해 유치원 졸업을 한 첫째 손자는 내일 입학식을 한다고 하였다.
오늘 아침 며느리가 입학식을 하는 손자의 사진을 보내 주었다.
아이들은 자라고 노인은 늙고 죽어가는 자연의 순리를 체감하였다.
수술을 준비하기 위해 팔에 큰 주사바늘을 꽂아야 하는데
담당 간호사가 주먹을 꼭 쥐라고 하면서 혈관을 찾아 바늘을 넣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꼭 감고 주사기가 어서 자리를
찾기를 바랬지만 간호사는 혈관을 찾지 못하였다.
여러번 혈관찾기를 시도하였지만 결국 미안하다고 하면서
잠시 쉬리고 하였고 나중에 다른 간호사가 왔다.
그 간호사는 손톱으로 내 손목을 살짝 긁으니 쉽게 혈관을 찾았다.
어느 분야에나 역시 베테랑이 있는 모양이다.
옆 병상의 환자들은 아침 식사시간인지 구수한 냄새가 스며 들었다.
나는 물도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오후 2시의 수술 시간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어찌 그리도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지....
며칠 전 MRI, CT 촬영할때는 마치 시간이 영원한 것 같았다.
오후에 수술시간이니 딸 아라는 점심을 먹고 오기로 하였다.
아라는 엄마의 말벗이라도 되어 주겠다고 일찍 오려고 하였다.
수술 소요 시간이 3시간이나 걸리니 천천히 오라고 하면서
오늘은 내 곁에서 자야 하니 잠 잘 준비를 하고 오라고 하였다.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수술 입실 통지가 도착하였다.
직원이 끌고 온 이동 병상으로 옮기면서 아라에게 카톡을 보냈다.
1달 전 세포 적출 수술시에는 8층 수술실을 이용하였는데,
누워서 바라보니 이번에는 3층 중앙 수술실을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지난 번에는 내가 다시 살아서 이 수술실을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번에는 모든 걸 하느님에게 맡기니 평화로웠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손에 맡겨 드리나이다.
그러면서도 성모님 저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고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리고 내 병상이 들어서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내 머리에 캡을 씌우고 수술대로 옮기고 내 팔목을 거치대에 올렸다.
수술복을 입은 간호사가 내 입술에 관을 끼웠는데
그 후 곧 나는 미취에 들어가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간호사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어느새 회복실로 옮겨져 있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를 아직 살려주셨군요.'
이동 병상으로 내 병실로 돌아오니 딸이 나를 반겨 주었다.
창밖으로는 서쪽으로 기운 햇살이 마지막 잔광을 비춰 환하였다.
그동안 마시지 못하였던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으니 행복하였다.
오늘 저녁은 죽을 먹느게 편할 것 같아 아라에게 죽을 사오게 하였다.
며칠 전 자가격리기간에는 내가 아라를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쏟았는데,
오늘은 아라가 나를 돌보아주는구나.... 생각하니 가족이 더욱 소중했다.
간호사는 수술시 목구멍에 관을 넣었으므로
목이 따갑고 가래가 끓을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가래는 없었지만 목구멍은 조금 따금거렸다.
아라가 전복죽을 사왔지만 도저히 그걸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병실로 돌아와 보았더니 왼손에 손목까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왜 붕대가 감겨 있을까? 담당 간호사가 붕대를 푸니
손등만 아니라 팔목에도 시퍼렇게 멍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등은 조금 붓기도 하여 냉찜질을 하라고 얼음팩을 주었다.
누웠다 일어나니 수술한 후유증인지 배가 당기고 아팠다.
웃옷을 열어보니 배꼽 가운데로 복강을 하였는지 그곳에 혈흔 자국이 있었다.
요즘은 로보트로 수술이 가능하다고 하였지만, 의사을 더 신뢰하고 싶었다.
3시간이나 좁은 복강경으로 들여다 보며 수술을 한 의료진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무통주사와 링거의 영향인지 배가 당기는 것 외에는 특별히 통증도 없었다.
아라가 옆에 누워 있으니 나는 편안하여 옆 병상의 코골이에도 잠을 잤는데,
아라는 잠을 뒤척이더니 병실 밖으로 나가 지하 2층 의자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4시간밖에 외출이 허락되지 않으니 집에 가서 잘 수도 없고 아라에게 미안했다.
2022. 3. 1. 화.
병상에서 지내야 하니 TV로 중계방송으로 보았던
31절 기념식도 보지 못하고 마냥 누워만 있었다.
내 몸에는 줄이 하나 더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건 소변줄이라고 하였다.
간호사는 매 시간마다 오줌을 양을 체크하여 기록하였다.
오줌줄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내가 앉아서 보는 것보다 시원하지 않았다.
간호사는 오줌줄을 제거하면서 10시까지 참았다가 소변을 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점점 방광이 차 오르는듯 하여 도저히 10시까지 참을 수가 없었다.
개인용 변기에 오줌울 받아 양을 체크하라고 하였는데 생각처럼 나오지 않았다.
어제 오후 수술이 끝난 후 담당 의사가 병실로 찾아와 아라에게
엄마의 수술이 잘 끝났다고 알려 주셨다고 하였지만,
나는 담당의사를 뵙지 못하였기에 아침에 회진을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은 법정 공휴일이라 의사의 회진이 없었다.
5병동에 상주하는 여의사가 5병동에 달린 처치실로 오라고 하였다.
내 수술한 아래쪽에 삽입되었던 가제를 뽑아내고
(사실 나는 그곳에 가제가 삽입되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 자리를
드레싱해 주면서, 상처가 잘 아물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간호사가 내 배위를 기계로 체크하더기 아직 방광이 비워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나는 가능한 참았다가 변기에 앉았는데 그때마다 시원하게 나오지 않아 힘들었다.
나중에 한 번 더 시도해보고 되지 않으면 다시 오줌줄로 뽑아야 한다고 하였다.
오줌을 자연스럽게 누는것도 관강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아라는 화장실로 따라 와 엄마처럼 내 등을 쓰다듬으려
변기통을 넣으며, 쉬~! 쉬~ 하고 응원을 보내어 우스웠다.
수도물을 힘껏 틀어 물소리를 들으면 소변이 더 잘 나올거라고 하였다.
나는 마치 빨래를 쥐어 짜듯이 배위를 누르면서 오줌을 누었다.
아침에 가늘게 흩뿌리던 봄비도 오후가 되니 그치고 햇빛이 났다.
다시 간호사가 와서 기계로 검사하더니 이번에는 성공이라고 하였다.
오후 4시. 오줌이 해결된 후 아라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지난 밤 잠도 못 잤으니 어서 가서 샤워하고 푹 자라고 하였다.
입원 전 담당 선생님은 3박4일 입원을 명령하였지만
오늘 회진이 없었으니 내일 과연 퇴원이 가능할까? 걱정이 되었다.
간호사에게 내일 퇴원하고 싶다고 하였더니 아직 미확인이라고 하였다.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수면 부족, 신경불안으로 회복이 더욱 힘들 것 같았다.
오른쪽 팔목에 꽂힌 주사바늘이 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원생활은 항상 링거병과 함께 생활해야 하니
주사바늘과도 친해야 하는데
나는 매번 그 주사바늘이 너무 아프고 거추장스러웠다.
누워 있다가 마침 옆 병상을 찾아온 간호사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사바늘이 아프다고 호소하였더니 이제 무통주사도 거의 끝나고
더 이상 링거액도 필요없이니 주사바늘을 제거해 주었다.
주사바늘을 제거하고 나니 훨훨 날아서 갈 것 같았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지하로 내려가 어둑한 복도를 여러바퀴 걸었다.
병원 현관밖도 나갈 수 있다고 하였지만 밤바람이 제법 차서 다시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서 이해인 수녀의 <그 사랑 놓치지 마라>를 읽었다.
이해인 수녀님도 암과 투병한다는 글을 어디에서 읽었다.
어제는 지인이 새로 출간하여 보내준 시집도 읽었다.
퇴원하기 전 원한다면 옆 병실의 환자에게 주고 갈 생각이다.
집에서는 마음놓고 들었던 음악과 유튜브를
이곳에서만 이어폰으로 들어야하니 그게 익숙하지 않아 귀가 아팠다.
2022. 3. 2. 수.
어제 봄비가 내린 후여서인지 열어 놓은 창으로 한결 훈풍이 불었다.
히터도 잠그고 커튼을 끝까지 올려 따스한 봄볕을 침대 가득히 들였다.
창밖으로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나도 오늘 퇴원을 하여 저 사람들처럼 걸어가고 싶었다.
8시 조금 지난 시각. 담당 선생님이 회진을 왔다.
나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다가
갑자기 담당선생님께서 내 병상을 찾아오시니 당황하였다.
얼른 일어나서 선생님께 두손을 합장하며 절을 하였다.
잘 회복하느냐고 물음에 나는 선생님 덕분이라고 인사했다.
이번에 수술을 하신 선생님은 내 아들 정도의 젊은 의사이지만
나에게는 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처럼 여겨졌다.
마음같아서는 큰 절을 올리고 싶었다.
선생님읜 외래 진료 날짜를 정하여 주면서 퇴원허락을 하셨다.
아. 정말. 오늘 바라던 퇴원을 할 수 있구나.
간호사가 준비해 준 서류를 들고 1층 원무과에서 퇴원수속을 밟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로비에는 환자와 보호자들로 붐볐다.
병원에 오면 모두 아픈 사람만 보인다는 말이 실감이 되었다.
3박 4일 입원 치료비는 국가에서 95%를 지원해 주어 120만원 정도.
본인이 100% 부담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부담이 될까?....
내가 의료 선진국의 국민임을 감사하게 생각하게 하였다.
코골이 환자도 오늘 퇴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어제 다 읽은 시집인데 혹시 읽겠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반갑게 받아 주었다.
엊그제 입실한 환자가 있으니 내놓고 퇴원을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 환자는 종일 커튼을 치고 있으니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그래도 한 병실에서 이틀을 보냈는데 그냥 살짝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커튼 앞에서 잘 치료받고 건강을 회복하시라는 인사말을 하였더니,
그 환자와 상주 보호자인 남편이 건강하시라고 화답을 하셨다.
11시쯤 퇴원 예정이니 그때쯤 병원에 오라고 어제 약속했는데,
퇴원수속이 빨라 혼자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아라에게 전화하였다.
병실로 돌아와 소지품을 정리하고 시트와 이불을 세탁실에 갖다 놓고,
집에서 입고 왔던 평상복과 신발을 신으니 괜스레 가슴이 벅찼다.
간호사에게 그동안 감사하였습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3월의 따스한 햇빛이 나를 포근히 감싸 안아 주는 듯 하였다.
아직 몇 번 더 외래 치료를 받기 위해 이곳을 찾아 올 것이지만
나에게 건강을 되찾게 해준 병원에게 살며시 손을 흔들어주었다.
2022. 3. 10. 목.
퇴원한 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하였으나 조심스러워진다.
가능한 집안에서 생활하려고 하였으며 햇빛이 좋은 날
집앞 한강공원으로 나가 천천히 강물을 바라보며 걸었다.
한 무리의 오리 가족이 나들이 나와 물속으로 자맥질하고 있었다.
강둑에는 억새가 하얀 꽃잎은 바람에 다 날아가버리고
가늘고 긴 빈가지만 남아서 강바람에 춤추둣이 나부끼고
양지쪽에는 초록빛 풀들이 우묵히 자라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몸을 뒤척이며 흐르는 물비늘이 햇빛에 눈이 시리게 반짝였다.
퇴원하면서 받은 5일분의 진통제를 다 먹었는데
외래진료일까지 아무 약도 먹지 않아도 되는 걸까? 걱정되었다.
입원하였을때는 몰랐는데 집에서 샤워하면서 자세히 들여다 보니
손등의 멍자국과 함께 곳곳에 푸릇푸릇 멍자국이 나타나고 있었다.
따로 약을 처방해 주지 않았으니 그냥 잘 먹고 잘 쉬는 것이 좋겠다.
그동안 시장도 못 갔으니 냉장고도 비어 버렸고 딸과 함께 시장에 가서
야채와 과일을 사서 자전거에 싣고 딸이 끌고 나는 빈손으로 걸었다.
딸도 모처럼 시장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니 기분 전환이 된다고 하였다.
며칠 전 시아버지 기일이라 딸과 함께 제사상도 차렸다.
기일을 맞이해 미사를 봉헌하였으나 간단하게나마 상을 차리고 싶었다.
아들 내외는 마산에 있으니 올 수 없고 나하고 딸만 절을 하였다.
건강이 좋지 않으니 다음에 아들에게 제사도 넘겨 주겠다고 하였다.
요즘은 코로나 감염이 우려되어 병문안도 허락되지 않는다.
멀리 강원도에 사는 막내가 언니 영양섭취 잘하라고 돈을 보내 주었고,
강남에 사는 여동생도 조카와 함께 퇴원 후 집으로 병문안을 와서
추어탕과 함께 봉투를 던져 놓고 갔는데 모두에게 감사하고 미안스럽다.
퇴원 후 일주일만에 외래진료를 갔다.
퇴원하는 날 회진시간에 잠시 뵈었던 담당 선생님에게
긴 시간 수술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진료실안에서 큰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선생님은 다행히 다른 곳으로는 전이가 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수술 후 뒷처리를 하고, 한 달 후 다시 외래 진료를 오라고 하셨다.
전에는 처치실에 누워서 다리 벌리기가 정말 수치스러웠으나
이제는 그냥 받아들이려고 하였지만 여전히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동안 크고 작은 병으로 여러 병원을 다녀보았지만
이번 입원을 계기로 한국의 의료 서비스가 날로 좋아진 것을 체험하였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 건강보험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더욱 건강에 관심을 쏟아 가능한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아야겠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매화를 찾아간 창덕궁 (0) | 2022.03.24 |
---|---|
봄마중(한강공원에서) (0) | 2022.03.15 |
시간 약속 (0) | 2022.02.27 |
봄이 오고 있어요 (0) | 2022.02.25 |
2022년 광진문협 신년하례식 (0) | 2022.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