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흔들리며 피는 꽃

푸른비3 2019. 11. 5. 03:04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 시인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       *        *

차창밖으로 가을이 익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집에 두고 온 딸 아라 생각을 하였다.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아라는 성장하면서 그 꿈이 음악교사로 바뀌었다.

늦은 가을날 갑작스레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은 어린 아라에게 어떤 큰 충격을 주었을까?

학급 반장이었던 아라는 그 날 교육청 행사 참석차 뒤늦게 소식을 받고 달려 온 병원 화단

정원석 사이에 피었던 연보랏빛 국화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고 하였다. 

나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던 그날 저물어 가는 서쪽 하늘에 초승달도 선명하였단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장례를 치루고 삼오제를 치룬 다음날 우리 모녀는 서울로 올라 왔다.

아라야, 그냥 마산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대학을 네가 원하는 진학하는게 어떻니?

물었더니 아라는 눈물어린 눈으로 지망하였던 예술고등학교에 실기 시험이라도

한 번 치고 싶다고 하여 젖은 몸과 마음을 추스려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라의 피아노 실기 시험 차례를 기다리는 학부모 대기실에 앉아

나는 모든 것 주님에 뜻에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아라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느랴 연습도 하지 못하고 굳은 손가락으로

실기시험을 치루었는데 의외로 합격하였다.

합격자 발표가 있은 후 내가 물었더니 아라는 10살 터울 오빠의 충고로

실제로 피아노 앞에서 연주를 할 수 없었지만 이메지 트레이닝을 하였다고 하였다.


여러 경쟁자를 물리치고 피아노과에 합격한 것을 보고는 서울 진학을 반대할 수 없었다.

어쩌면 피아니스트가 될 운명의 아이를 내가 가로 막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아라는 생각과는 달리 서울에 진학한 후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실감하였다고 하였다.

자가용으로 학교를 등교하는 급우들과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등교하는

자신과는 처음부터 너무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친구의 부모들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가용으로 학과 과목 학원으로 모셔 갔지만

자신은 학교 연습실에서 10시까지 연습하고 밤길을 버스를 타고 귀가하여야 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이 어둡고 거리가 멀어 내가 마중을 나갔으나

아라는 부담된다고 극구 반대하여 그만 두었으나 사실 초저녁잠이 많은 나는

아라가 집에 도착하기 전 살풋 잠속에 빠지기도 하였다.

부족한 과목을 과외를 시켜주어야 하는 것도 몰랐고 무엇보다 대학 입시 정보도 없었다.

그냥 밥 따뜻하게 챙겨 주고 집에서 기다리면 되는 줄 알았다.

처음 아라가 서울로 진학하게 되었을 때 아라만 서울로 보내려고 하였다.

서울에 사는 오빠와 동생은 직장도 없고 남편도 없으면서 왜 어린 아이를

험악한 서울에 혼자 보내려고 하느냐고 하여 아라와 함께 서울로 이사하였다.


아라가 없는 빈 집을 종일 지키면서 남모르게 많이 울었다.

다행히 집앞의 한강을 걷는것이 참 많은 위로가 되었다.

강둑에 피어나는 버들 강아지와 연녹색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나무 사이로 걷다가

발밑에 피어난 자잘한 풀꽃을 무릎을 끓고 들여다 보았다.

그 작은 풀꽃은 정원에 피는 화려한 꽃과 똑 같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다.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꽃잎속에 암술과 수술 모두를 간직하고 있었다.

연약한 꽃대위의 꽃받침 사이로 연한 꽃잎을 내민 좁쌀처럼 작은 풀꽃을 바라보며

작은 꽃속에 커다란 우주가 들어 있다는 어디서 읽은 글귀를 생각하고 미소지었다.

아직 쌀쌀한 강바람속에 흔들리며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중학교부터 마산에서 살았던 나에게 서울은 참으로 낯설고 정붙이기 어려운 동네였다.

동생과 오빠가 서울에 살고 있었지만 각자의 생활이 있으니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취미로 쭉 유화를 그렸으나 서울로 이사온 후에는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으나

적당한 장소가 없어 그냥 문화 센타에 나가 수채화를 그리는게 전부였다.

유화는 도구가 많고 무거우니 들고 다니기 쉽지 않아 혼자서 집에서 그리려고

하였지만 의지가 약한 나에게는 그게 싶지 않아 집에서는 거의 붓을 들지 않았다.


동네 주민센터 작은 도서관에 봉사자를 모집한다는 플랭카드를 보고

봉사자 신청을 하여 봉사를 하면서 다양한 책을 볼 수 있는 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이왕 봉사활동을 시작하였으니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어 사이버 사회복지학과에

등록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동안 담을 쌓았던 공부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컴퓨터 다루는 게 어려웠는데 컴퓨터로 정해진 시간에 시험을 치는 게 가장 힘들었다.

시험을 치는 도중 갑자기 컴퓨터가 다운이 되면 어쩌나 불안감을 안고 시험을 쳤다.


다행히 4학년 실습까지 마치고 졸업을 하였으며 복지사 자격증을 받아 뿌듯하였다.

사회 복지학 공부를 하면서도 창가에 어둠이 밀려들면 외로움으로 가슴이 휑하였다.

창으로 바라보는 잠실의 불빛이 고흐의 그림 '별이 반짝이는 밤' 같아서 이뻤지만

불빛이 어룽대는 강물이 더욱 외로움을 더하는 것 같아 커튼을 내리고 펑펑 울었다.

그럴때 걸려오는 아들의 전화를 받으면 남편에게 하듯이 아들에게 투정을 하였다.

슬픈 음악을 듣지 말고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하였으나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대학 4학년 졸업반이었던 아들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앞에 부쩍 성장을 하였다.

아들은 대학을 채 졸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인의 소개로 작은 하청업체에 들어가서

가장의 노릇을 하였는데 내가 서울로 이사갈 것을 망설이고 있을 때 적극 권장하였다.

자신은 이제 성인으로 독립하겠으니 아직 어린 동생을 보살려 주라고 권하였으며,

작은 원룸으로 옮겨 생활하면서 다달이 동생의 학비에 보태라고 100만원을 보내 주었다.

내가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고 하였으나 병원비가 더 들지도 모른다며 반대하였다.

매일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퇴근하면서 안부전화를 보내주는 아들이 참 든든하였다.


내가 늦동이 아라를 임신하고 입덧으로 힘들어 할 때 겨우 9살인 아들은 지금 힘들지만,

곧 이쁜 아기가 태어나서 방긋방긋 웃을테니 꾹 참고 이겨내라고 다독여주었다.

동생이 태어나자 10살의 터울을 둔 아들은 동생을 끔찍히 사랑하고 챙겨 주었다.

동생과의 우애는 지금도 여전하여 서로 챙겨주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면 참 흐뭇하다.

자신을 챙겨주는 오빠를 염려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 늦게라도 잘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올케 언니와 어린 조카를 생각하는 마음도 끔찍하여 오히러 내가 속으로 놀라기도 한다.


딸 아라는 세대차이가 나는 구닥다리 엄마보다 같은 세대인 오빠가 잘 통할 것이다.

지금 유행하는 노래를 같이 부르고 오빠가 가입한 음악 싸이트로 함께 음악을 듣고

컴퓨터 원격 장치를 통하여 같이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슬며시 부럽기도 한다.

아들도 가정을 이루어 이제 두 아이의 아빠로 자기 가정 챙기기도 바쁠텐데

요즘 취업준비로 힘든 아라에게 수시로 전화하여 안부를 물어주니 참 고맙다.

딸 아라도 멀리 있는 오빠와 올케언니 두 어린 조카의 기념일을 꼼꼼히 챙겨준다.


서울로 이사하여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처음 학부모 모임에 나가 보았을 때

학생들이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참 지방과 차이가 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아이들속에 사투리를 쓰는 아라가 촌뜨기로 놀림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였으나,

다행히 아라는 잘 적응하여 친구들도 사귀고 원만한 학교생활을 하여 나를 안심시켰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만으로 유명 대학 입시준비를 한다고 생각하였던 나는

여지껏 하였던 것처럼 그냥 딸이 알아서 잘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지방에서 한 번도 과외를 시키지 않았지만 아라는 항상 상위권을 맴돌았기에

공부는 자신이 알아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딸을 믿었던 무지한 엄마였다.


돈버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여기저기 입시정보라도 듣고 적극 준비를 하여야 했는데,

사실 나는 서울의 유명 대학에 들어가려면 내신 성적 몇 등급을 받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피아노과를 지망하였으므로 실기만 우수하면 가능하리라 생각한 바보 엄마였다.

지망한 유명 대학에 낙방하였을 때 아라는 재수하기를 원하였지만 내가 반대하였다.

어느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네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잘 칠 수 있으면 되고,

재수하는 노력으로 열심히 하여 외국 유학을 하는게 좋겠다고 적극 만류하였다.


2차 시험은 준비한 곡이 비슷해야 하여 선택의 폭이 짧아 아라는 무척 망설였다.

지망한 대학에 합격하였지만 적응하기 어려워 중간에 자퇴를 하겠다고 하였는데,

학우들과 함께 여름 캠프를 다녀 온 후 아라는 마음을 잡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유학 이야기가 나오자 지도 교수님께서 미국의 대학으로 유학할 것을 권장하셨다.

요즘은 피아노 분야는 유럽권보다 미국이 유리하고 우세하다고 하였는데 고민되었다.

막상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려고 하니 학비며 생활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갈 것 같았다.


아라가 꼭 원한다면 부동산을 팔아서라도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생각하였는데,

막상 유학을 진지하게 생각하니 돈보다 내가 혼자서 살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여지껏 아라를 보살핀다고 하였지만 오히러 내가 아라에게 의지하고 살았던 것 같았다.

아라없이 살 것을 생각하니 망막하였는데 다행히 아라는 미국 유학을 포기하였다.

깊이 생각해보니 자신은 무대에 서는 것이 항상 불안하였고 두려웠다고 하였다.

엄마와 가족이 있는 한국을 떠나 낯선 외국에서 혼자 살 자신도 없다고 하였다.


아라의 선택을 내심 반가웠으나 내가 딸의 앞길을 가로 막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며칠을 두고 생각한 뒤에 자신은 평소에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다고 하면서

교육대학원 진학을 하여 음악 선생님이 되는게 좋겠다고 하여 나도 적극 찬성하였다.

"그래. 연주가의 길이 얼마나 험준한지 너도 잘 알고 있지?

물론 교사의 길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지만 우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으니 좋아.

특히 방학이 있으니 니가 좋아하는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맞장구쳤다.


대학교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아라는 원하는 대학원 교육학과에 진학하여

대학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였고 용돈도 마련하였다.

피아노 개인 레슨도 하고 반주를 하면서 용돈을 마련하였는데 걱정이 되었다.

지금 당장 용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사임용고시 준비를 하여야 할 것 같았다.

낙천적인 나를 닮은 아라는 대학원 졸업을 앞 둔 올해부터 고시 준비를 하였다.

노량진 학원에 등록하여 일주일에 2번 학원으로 가면서도 아르바이트를 계속하였다. 

학원비와 실기 레슨비가 만만치 않게 드니 나도 은근히 학비를 스스로 버는 것을 바랬다.


푸르던 나뭇잎들이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갈 무렵 아라는 목과 등 어깨가 아프다고 하소연하였다.

다친 곳도 없으니 시험에 대한 부담감으로 생긴 근육통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편하게 가지라고 하였지만 아라는 점점 통증이 심하다고 하여 정형외과에 가 보았다.

혹시 디스크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하여 X - Ray 사진도 찍어 보았지만 이상은 없었다.

정형외과의 물리치료를 받아보고 한의원 치료도 받아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어쩌면 단번에 합격을 바라는 엄마의 바램이 강한 압박감을 주었을 것 같았다.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아라에게 나는 공부를 중단하고 며칠 쉬라고 하였다.

아라는 학원에 등록한 이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준비가 부족한 지 깨달았던 모양이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아라에게 우리나라 전통음악은 새로운 분야의 공부였다.

국악 강의를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고 여러종류의 부호도 알 수 없었다고 하였다.

뒤늦게 민요와 창, 단소를 배우려니 다른 준비생에 비하여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은 앞서고 이해도 되지 않는 공부를 하려니 답답하고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정보가 부족하여 음악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의 음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시험준비를 하고 난 이후로 아라는 친구와의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고

멋부리기를 좋아하였지만 거의 맨 얼굴에 트레이닝 복장으로 지내는 것 같았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책속에 묻혀 지내는 것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꽃놀이 나온 젊은 데이트족을 보면 집에 있는 아라가 생각나 꽃잎을 선물하였다.

아라는 학과 공부와 겸하여 민요와 성악, 장구 등 개인 교습을 받으며

실기 준비를 하였는데, 돈이 없으면 교사 임용고시 준비도 할 수 없겠다고 하면서

지금 직장을 가진 모든 사람이 참 대단하게 보이며, 좀 더 겸손해져야겠다고 하였다.


나는 뜨거운 물을 담은 찜질기를 구하여 아라에게 찜질을 해주면서 다독거려 주었다.

엄마에게는 시험에 합격하는 것 보다 우리 딸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 가장 소중하단다.

그동안 네가 내곁에 있어서 엄마는 참 많은 위안을 받았고 행복하였단다.

꼭 중등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지 않아도 네가 잘하는 피아노를 가르칠 수 있는 일을 해도 좋아.

그냥 내곁에서 착하고 이쁜 내 딸로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 행복하단다.

마음을 편히 가지고 천천히 처음부터 준비해서 내년에 다시 시험을 치는것도 좋아.

올해는 그냥 시험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고 위로를 해 주었다.


아라는 학원에도 가지 못하고 보름을 아프고 난 후 서서히 통증에서 벗어나는 듯 하였다.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 마음을 비우고 나니 자신도 편안해졌고 바라보는 나도 마음이 놓였다.

먼저 나 자신이 올해 꼭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고 나니 느긋해졌다.

밤늦도록 공부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결과를 성취하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결과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결과는 노력한 만큼만 결실을 안겨 준다고 하였으니 지나친 것은 바라지 않기도 하였다.


이제 일주일 후면 시험이다.

무언가 의지하고 싶어 틈이 나면 평일 미사에도 자주 참여하게 되었다.

그동안 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라는 나의 욕심 가득하였던 기도는

시험을 치는 그날까지 건강을 지켜 주시며

그동안 연마한 공부를 실수없이 잘 표기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의 기도로 바뀌었다.


아침에 아라에게 도종환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하얀 종이에 필사하여 주었다.

아라야. 이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흔들리며 피어 나고

그 어떤 빛나는 꽃도 젖으며 피어난다고 하지 않니?

너도 지금 흔들리며 젖으면서 아름답고 빛나는 꽃을 피운다고 생각하렴.

도종환의 <흔들리면 피는 꽃> 시가 적힌 종이를 가슴에 안고

눈물젖은 눈으로 "엄마 고마워~! "하는 딸을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