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그해 여름

푸른비3 2024. 10. 25. 05:00

 
  땅거미가 내릴 무렵, 누군가가 우리집 대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잠시 후 밀집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머뭇거리며 마당 안으로 들어선 그는,
"저 혹시 이 집 어른, 논에 나가셨습니까?....." 하고 말문을 열었다.
나는 문간에서 제법 떨어진 마루에 있었기에, 무슨 말이 이어졌는지 듣지 못하였지만,
엄마와 방금 학교에서 돌아온 작은 오빠는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마당 한 켠의 드럼통으로 만든 임시로 만든 화덕에는 보릿단을 태워 지은 밥은 식어가고,
장독대 위로 늘어진 석류나무에서 붉은 석류꽃이 지나가는 바람에 툭 떨어졌다.
뉘엿뉘엿 해는 저물고 소먹이를 나갔던 여동생이 소고삐를 쥐고 울면서 돌아왔다.
"언니야, 아버지가 물에 빠졌다고 한다. 나도 얼른 가볼게."
동생은 외양간에 소를 몰아넣고 강가로 나가려고 하였지만,
나는 동생의 옷자락을 꼭 잡아 당겼다. "아니야. 너가 가면 어떡해?
우리는 집을 지켜야지." 항상 엄마의 치마꼬리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막내보다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지만 나보다 더 씩씩한 여동생이 의지가 되었다.
 
마당을 스치는 초저녁 바람소리가 스산하게 들려 무서웠다.
바람결에 자박자박 아버지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어둠이 짙어지는 문간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언니야. 우리 아버지 살아서 오게 기도하자."
동생의 말에 우리는 울먹이며 함께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였다.
마루에 내걸린 전구의 빛이 흐려 마당은 더욱 컴컴해졌다.
푸성귀가 자라는 채마밭 곁의 헛간에서 무언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어둠이 마당을 지울 무렵, 어머니는 마을 사람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서
어둠 속에서 강가를 뒤지기 위한 횃불을 부지런히 만들었다.
기다란 대나무 막대 끝에 돌돌 뭉친 솜뭉치를 매달고
커다란 드럼통 기름에 푹 담군 여러 개의 횃불 도구를 만들었다.
 
마당에 커다란 차일을 치고 촉수 높은 전등도 여러 개 매달았다.
아버지는 그날 논에 농약을 치러 가셨다.
뙤약볕에 혼자서 농약을 친 후 가까운 강에 들어가
목욕을 하다가 변을 당하셨다. 우리집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해도 되지만, 아버지는 평소에도 마루에 오르기 전에
빗자루로 먼지를 털고서야 올라오시는 깔끔한 성격이라 
우선 농약이 묻은 손발이라도 간단히 씻으려고
강으로 내려갔던 모양이었다.
엊그제 내린 비로 강물이 많이 불어났는데,
평소 수영도 곧잘 하셨던 아버지는 순간 발을 헛디뎌
물속으로 발려 들어갓고,
소용돌이 휘말려 결국 나오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늦은 밤이 깊어서야 실족된 장소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셨다.
마당에는 친족과 이웃들이 웅성거렸지만,
나는 이 모든 모습과 상황이 현실같지 않았다.
모든 것은 꿈이고 아버지는 짠~!하고 웃으면서 나타나실 것만 같았다.
근처의 친지들이 하나둘 울면서 오셨고,
늦은 밤, 타지로 시집간 언니들도 머리를 풀어헤치고
대문 밖에서부터 곡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군대 간 큰 오빠는 지난 초여름 월남으로
파병가셨기에 연락도 닿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불렸던 큰 오빠는
인근 도시에서 열렸던 예술제에 나가서 큰 상도 많이 받아왔지만,
딸린 식구 많은 빈농의 아들로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여
성악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라디오도 제대로 없었던 시대여서 유명 오페라의 아리아는 물론
가곡도 제대로 들을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오빠는 정식으로 배우지도 않고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다양한 가곡과 아리아를 노래하였다.
나는 우리 오빠가 부르는 노래가 가장 좋았다.
오빠가 부르는 '그대의 찬 손', '별은 빛나건만' 등의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면 나는 아득한 아름다운 세상으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사춘기 소녀의 가슴에 파고드는 오빠의 노래는
어느 테너 목소리보다 훌륭하였다.
근방의 여학생들은 모두 오빠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였고
오바가 거처하던 사랑방에는 늘 많은 여학생들이 드나들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오빠는 해병대에 지원하였고
가족과 상의도 하지 않고 월남 파병을 지원하였다.
오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받은 달러는
우리집에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늘 아들의 안녕이 염려되었던 어머니는
오빠가 보낸 그 돈을 차마 쓰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다.
 
근방의 친지들은 연락이 닿아 하나둘 집으로 모여 들었지만,
인근 도시에 사는 고모는 연락이 닿지 않아
어머니는 중학교 1학년인 나에게 고모집에 다녀 오라고 하셨다.
늘 소심하여 혼자서 나가기를 두려워하였지만,
나는 눈물을 훔치며 기차역으로 갔다.
역으로 가는 길은 평소보다 한참 멀게 느껴졌고
정수리에 쏟아지는 뙤약볕으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평소에는 기차를 타면 창밖 경치를 총천연색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즐겼지만,그날의 창밖 풍경은 흑백 영화 같았다.
넘칠듯이 흐르는 강물, 무논에 시퍼렇게 자라는 벼.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 포플라 늘어진 신작로길.
다가왔다 멀어지는 산과 옹기종기 엎드린 마을,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하룻밤 사이에
우리 가족만 먼 곳으로 떠밀려 간 것 같았다.
 
끄억끄억 울음을 참는 고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니
우리집은 마치 잔칫집처럼 사람들로 웅성거렸고,
울타리 역할을 하였던 감나무 아래에는 커다란 가마솥에
붉은 소고기국이 끓고 있었고 전을 부치는 기름 냄새도 진동하였다.
넓은 마당에 친 하얀 차일은 바람에 흔들거렸다.
차일 아래 멍석을 여러장 깔아 놓고 술상을 앞에 놓은 사람들도 많았다.
인근 마을 사람들의 말소리, 곡소리, 웃음소리,
마루에서 들리는 성당 신자들의 연도소리도 딴세상 사람들 소리 같았다.
막 사춘기에 접어 들었던 나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사람들이 평소처럼 먹고 마시고 소리 지르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사람이 살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는 이제 다시는 살아서 돌아올 수는 없는가?
저 하늘에서 지금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을까?
산사람들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어른들처럼 누런 삼베옷을 입고
짚으로 똬리를 튼 수건을 쓰고 상여를 따라 갔다.
아버지가 밭농사를 짓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걸어가셨던
신작로는 멀기만 하였다.
                                       
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포플라 나뭇잎.
일정한 간격으로 늘여선 전봇대. 길가의 실개천을
눈물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나는 발밑에 밟히는 자갈돌에 하마터면 꼬꾸라질 뻔하였다.
평소에 아버지 혼자 걸어다니시던 그 길을
오늘은 만장을 앞세우고 꽃가마를 타고 가시는 아버지.
 어머니 심부름으로 중참을 들고 가면 일손을 놓고 반가이 맞이해 주셨던
아버지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만화를 좋아하였던 나에게 "만화가 너거 할비보다 좋으냐?" 하시면서도
방바닥에 엎드려 도화지에 만화를 그리는 나를
그윽한 눈으로 내려다보셨던 아버지.
작은 오빠와 티격태격 다투면 늘 내편이 되어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셨다.
바쁜 농사일 틈틈이 신문과 잡지, 성경을 읽으시고,
아래채 대청 마루에 누워 시조창을 나직이 노래하셨던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엉엉 울었다.
눈물이 앞을 가린 내 눈에, 갈가뫼기 우리 콩밭 한 귀퉁이에
흐드러지듯 피어난 보라와 하얀 도라지꽃이
바람에 출렁이듯 춤을 추고 있었다.
(2024 광진문학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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