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_노천명
앞벌 논가에선 개구리들이 소낙비처럼 울어 대고, 삼밭에서 오이 냄새가 풍겨오는 저녁 마당 한 귀퉁이에 범산덩굴,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째로 들어가 한데 섞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는 것이나, 그것은 다만 모깃불로만 쓰이는 이외에 값진 여름밤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달 아래 호박꽃이 화안한 저녁이면 군색스럽지 않아도 좋은 넓은 마당에는 이 모깃불이 피워지고 그 옆에는 멍석이 깔려지고, 여기선 여름살이 다림질이 한창 벌어지는 것이다.
멍석자리에 이렇게 앉아 보면 시누이와 올케도 정다울 수 있고, 큰애기에게 다림질을 붙잡히며, 지긋한 나이를 한 어머니는 별처럼 머언 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함지박에는 갓 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오란 강냉이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오는 법이겠다.
쑥대불의 알싸한 내를 싫찮게 맡으며 불부채로 종아리에 덤비는 모기를 날리면서 강냉이를 뜯어먹고 누웠으면 여인네들의 이야기가 핀다.
이런 저녁 멍석으로 나오는 별식은 강냉이뿐이 아니다.
연잣간에서 갓 빻아 온 햇밀에다 굵직굵직하고 얼숭덜숭한 강낭콩을 두고 한 밀범벅이 또 있겠다. 그 구수한 맛은 이런 대처의 식당 음식쯤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온 집안에 매캐애한 연기가 골고루 퍼질 때쯤 되면 쑥 냄새는 한층 짙어져서 가정으로 들어간다. 영악스럽던 모기들도 아리숭 아리숭 하는가 하면 수풀 기슭으로 반딧불을 쫓아다니던 아이들도 하나 둘 잠자리로 들어가고, 마을의 여름밤은 깊어지고 아낙네들은 멍석 위에 누워서 생초 모기장도 불면증도 들어보지 못한 채 꿀 같은 단잠이 퍼붓는다.
쑥은 더 집어넣는 사람도 없이 모깃불의 연기도 차츰 가늘어지고 보면, 여기는 바다밑처럼 고요해진다.
굴(洞窟)속에서 베를 짜던 마귀 할미라도 나와서 다닐 성부른 이런 밤엔 헛간 지붕 위에 핀 박꽃의 하아얀 빛이 나는 무서워진다.
한잠을 자고 난 아기는 아닌 밤중 뒷산 포포새 울음소리에 선뜻해서 엄마 가슴을 파고들고 삽살개란 놈이 괜히 짖어대면 마침내 온 동리 개들도 달을 보고 싱겁게 짖어대겠다.
* * *
여름밤
정순이
기후 변화로 이제 겨우 7월 초순인데도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다.
지난 밤, 초저녁 잠이 많은 나는 TV를 시청하면서 풋잠이 살짝 들었던 모양이다.
푸시시 일어나 얼핏 휴대폰을 들여다 보니 친구의 문자 메시지 들어와 있었다.
....앞벌 논가에선 개구리들이 소낙비처럼 울어 대고, 삼밭에서 오이 냄새가
풍겨오는 저녁 마당 한 귀퉁이에 범산덩굴,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째로
들어가 한데 석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는 것이나, 그것은 다만 모깃불로만
쓰이는 이외에 값진 여름밤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노천명의 <여름밤>의 일부분을 보내 주었는데,
선밤이 깬 나를 단박에 내 유년의 여름밤으로 떠나게 하였다.
내 유년의 여름밤은 마당 한 가운데 지펴놓은 모깃불로 푸르스름하였다.
해가 저물고 감나무 그림자가 마당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면 우리는
아버지가 마당에 펴 놓은 멍석에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저 별은 내 별. 저 별은 언니 별." 별을 헤아리며 도란도란 이야기 하였다.
밤이 깊어지면 더운 열기는 사라지고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 무렵,
주먹만한 커다란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가르며 별똥별이 떨어지곤 하였다.
하얗게 빗금을 그으며 휙~하고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 우리는 어디선가
한 생명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재빠르게 성호를 그었다.
언니는 캄캄한 밤하늘에서 가끔 천사가 날개를 저으며 내려온다고 하였다.
그 천사는 죽음이 가까운 사람을 찾아오는 저승천사인데,
그 천사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곧 이 세상에서 죽게된다고 하였다.
어린 마음에 죽는 것이 무서워 밤하늘을 마음껏 올려 볼 수도 없었다.
어두운 밤이 무서워 혼자서 대추나무 울타리로 둘려쌓인 헛간에도 못갔다.
마당에 땅거미가 내릴 무렵, 닭장 앞에 종이를 깔고 밤똥을 누는 나에게
아버지는 "닭아, 닭아! 밤똥은 네가 누고 낮똥은 내가 누고~!" 닭에게
주문을 외우라고 하셨고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한동안 밤똥을 누지 않았다.
우리집 뒤에는 그 당시 시골치고는 규모가 상당히 큰 성당이 있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세 그루 있어 여름이면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입구에 서있는 높은 성모마리아상이 우리 마을을 지켜준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학교가 파하면 책보따리를 마루에 던져 놓고 성당 마당으로 달려갔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성당 마당에서 숨박꼭질을 하였다.
성당 뒤에는 커다란 대나무가 무성하여 대낮에도 으스스 한기가 느껴졌다.
아이들은 대나무밭에 들어가 숨었는데 술래가 된 나는 대나무잎이 바람에
스치는 "스스슥~! "하는 소리가 무서워 대나무 밭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외할머니집은 바로 그 대나무밭 뒷쪽에 있었는데 할머니와 놀다가
땅거미가 내릴 무렵 혼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눈을 감고 뛰었다.
밤이 되면 탱자나무 울타리에 푸르스름한 빛의 반딧불이 날아다녔는데,
어둠속에 깜박이는 그 반딧불이 어머니의 이야기속의 도깨비불 같았다.
무서움이 유달리 많으면서도 나는 무서운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어머니를 졸라 몇 번이나 들었던 도깨비불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공동묘지에 나타난 하얀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 이야기를 들으면
등골이 찌릿하면서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늘 궁금하였다.
여름 보릿타작이 끝난 우리집 마당에는 대추나무 울타리를 따라
반들반들 윤이나는 노란 보릿단이 여름동안 가득 세워져 있었다.
그 보릿단에서 나는 풋풋하면서도 싱그러운 풀냄새가 좋았다.
오빠는 그 보릿대로 여치집도 만들고 물동이 받침대도 만들어 주었다.
장독대옆 석류나무가 빨갛게 꽃이 필 무렵,
어머니는 마당에 가설한 아궁이에 보릿단을 넣고 불을 지펴
커다란 양은 솥에 애호박을 숭숭 썰어 넣고 칼국수를 끓였는데 ,
하얀 머릿수건을 쓴 어머니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가득 하였다.
여름밤이면 동네 언니들을 따라 새또랑에 목욕을 갔다.
달님이라도 환한 밤이면 우리는 첨벙첨벙 물장구도 치고,
깔깔웃으며 서로의 몸에 물을 끼얹으며 장난을 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밤하늘에는 하얀 은하수가 강물처럼 흘렀다.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면 낮의 열기는 사라지고 서늘하였다.
평상에 누워 까무룩이 잠이 들면 어머니가 방에 가서 자라고 흔들어 깨웠지만
깊이 잠든 척 하면 나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눕혀 주셨다.
꿈에서라도 다시 한번 어머니의 품에 안겨 달콤한 어머니의 냄새를 맡고 싶다.
* * *
여름밤
정순이
기후 변화로 이제 겨우 7월 초순인데도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다.
지난 밤, 초저녁잠이 많은 나는 TV를 시청하면서 풋잠이 살짝 들었던 모양이다.
푸시시 일어나 얼핏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친구의 문자 메시지 들어와 있었다.
....앞벌 논가에선 개구리들이 소낙비처럼 울어 대고, 삼밭에서 오이 냄새가
풍겨오는 저녁 마당 한 귀퉁이에 범산덩굴,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째로
들어가 한데 석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는 것이나, 그것은 다만 모깃불로만
쓰이는 이외에 값진 여름밤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노천명의 <여름밤>의 일부분을 보내 주었는데,
선잠이 깬 나를 단박에 내 유년의 여름밤으로 떠나게 하였다.
내 유년의 여름밤은 마당 한 가운데 지펴놓은 모깃불로 푸르스름하였다.
해가 저물고 감나무 그림자가 마당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면 우리는
아버지가 마당에 펴 놓은 멍석에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별은 내 별. 저 별은 언니 별." 별을 헤아리며 도란도란 이야기 하였다.
밤이 깊어지면 더운 열기는 사라지고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 무렵,
주먹 만 한 커다란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가르며 별똥별이 떨어지곤 하였다.
하얗게 빗금을 그으며 휙~하고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 우리는 어디선가
한 생명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재빠르게 성호를 그었다.
언니는 캄캄한 밤하늘에서 가끔 천사가 날개를 저으며 내려온다고 하였다.
그 천사는 죽음이 가까운 사람을 찾아오는 저승천사인데,
그 천사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곧 이 세상에서 죽게 된다고 하였다.
어린 마음에 죽는 것이 무서워 밤하늘을 마음껏 올려 볼 수도 없었다.
어두운 밤이 무서워 혼자서 대추나무 울타리로 둘려 쌓인 헛간에도 못 갔다.
마당에 땅거미가 내릴 무렵, 닭장 앞에 종이를 깔고 밤똥을 누는 나에게
아버지는 "닭아, 닭아! 밤똥은 네가 누고 낮 똥은 내가 누고~!" 닭에게
주문을 외우라고 하셨고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한동안 밤똥을 누지 않았다.
우리 집 뒤에는 그 당시 시골치고는 규모가 상당히 큰 성당이 있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세 그루 있어 여름이면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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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서있는 높은 성모마리아상이 우리 마을을 지켜준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학교가 파하면 책 보따리를 마루에 던져 놓고 성당 마당으로 달려갔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성당 마당에서 숨바꼭질을 하였다.
성당 뒤에는 커다란 대나무가 무성하여 대낮에도 으스스 한기가 느껴졌다.
아이들은 대나무밭에 들어가 숨었는데 술래가 된 나는 대나무 잎이 바람에
스치는 "스스슥~! "하는 소리가 무서워 대나무 밭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외할머니 집은 바로 그 대나무밭 뒤쪽에 있었는데 할머니와 놀다가
땅거미가 내릴 무렵 혼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눈을 감고 뛰었다.
밤이 되면 탱자나무 울타리에 푸르스름한 빛의 반딧불이 날아다녔는데,
어둠속에 깜박이는 그 반딧불이 어머니의 이야기속의 도깨비불 같았다.
무서움이 유달리 많으면서도 나는 무서운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어머니를 졸라 몇 번이나 들었던 도깨비불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공동묘지에 나타난 하얀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 이야기를 들으면
등골이 찌릿하면서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늘 궁금하였다.
여름 보리타작이 끝난 우리 집 마당에는 대추나무 울타리를 따라
반들반들 윤이 나는 노란 보릿단이 여름동안 가득 세워져 있었다.
그 보릿단에서 나는 풋풋하면서도 싱그러운 풀냄새가 좋았다.
오빠는 그 보릿대로 여치집도 만들고 물동이 받침대도 만들어 주었다.
장독대 옆 석류나무가 빨갛게 꽃이 필 무렵,
어머니는 마당에 가설한 아궁이에 보릿단을 넣고 불을 지펴
커다란 양은솥에 애호박을 숭숭 썰어 넣고 칼국수를 끓였는데 ,
하얀 머릿수건을 쓴 어머니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가득 하였다.
여름밤이면 동네 언니들을 따라 *샛또랑에 목욕을 갔다.
달님이라도 환한 밤이면 우리는 첨벙첨벙 물장구도 치고,
깔깔 웃으며 서로의 몸에 물을 끼얹으며 장난을 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밤하늘에는 하얀 은하수가 강물처럼 흘렀다.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면 어느새 낮의 열기는 사라지고
살랑이며 감나무 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하였다.
-2-
물놀이로 고단한 몸은 평상에 누우면 이내 까무룩이 잠이 들었고,
어머니는 방에 가서 자라고 흔들어 깨웠다. 깊이 잠든 척 눈을 감고 있으면,
어머니는 나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눕혀 주셨다.
이제는 내가 어머니 나이보다 더 늙어 버렸지만 꿈에서라도
다시 한 번 어머니의 품에 안겨 달콤한 어머니의 냄새를 맡고 싶다.
2022. 7. 1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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