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3월
내가 앉아있는 컴퓨터 앞 창밖으로 뚝방길 벚꽃이 활짝 피어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춥지 않았던 겨울 영향으로 올해는 다른 해보다 봄꽃들이 일찍 피기 시작하였다.
매년 봄이면 피는 꽃이지만 올해의 꽃의 빛깔은 더욱 선명하고 찬란하고 곱다.
화사한 꽃과는 다르게 내 마음속의 봄은 뿌옇게 바랜 빛깔이다.
봄에 들어선다는 立春무렵부터 나돌기 시작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처음 이웃 나라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몇 년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바이러스 전염병이니 그냥 가볍게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雨水가 지나고 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으로 모든 모임이 다 차단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서 지내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이웃과 함께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 나는 동호회. 취미활동 등 스케줄을 세워 하루도 빠짐없이 평생학습교실로 나갔다.
3월 중순부터 복지관의 영어, 일본어 수업이 폐쇄되더니, 문화회관의 그림수업, 시 창작 수업 등이
중단되었고 나중에는 요가 댄스 등 모든 것이 다 중단되어 종일 집에서 지내야 하였다.
매일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 집을 나서다가 집에만 있어야 되는 것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종교 활동이 중단된 것이 가장 마음 아팠다. 종교생활이 중지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였는데 지난 2월 23일부터 미사참례를 할 수 없었다.
2월 26일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는 사순시기 동안 성당에 갈 수 없는 것이 힘들었다.
모태신앙인 나는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미사참례는 그냥 습관이 되어 버렸다.
외국 여행을 가더라도 가능한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습관적으로 가던 미사에 참석할 수 없으니 그게 바로 은총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미사 드리면서 잡념에 빠지거나 다른 세계를 헤매기도 하였지만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 그리웠다.
한 달 전부터 집에서 가톨릭 평화방송을 통하여 미사를 드리면서 우리 선조들의 신앙을 돌이켜 보았다.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학자들 사이에 자생적으로 신앙을 받아 들였고 신부님 없이 미사를 하였다.
한국 천주교 전례 역사상 성당에서 미사를 할 수 없었던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였다.
딸 아라의 반주로 시작되는 새벽미사에 참여할 수 없으니 그게 서운하고 안타깝고 그립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함으로써 모임은 피하고 혼자서 지내는 습관을 길러야만 하였다.
그동안 멀리하였던 책을 가깝게 하게 되었고, 피아노 뚜껑을 열어 잊어 버렸던 곡들을 연주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양희은의 <하얀 목련>을 연주하면서 아득하고 희미해진 청춘시절을 되돌아보았다.
한쪽 구성에 처박아 두었던 대금을 꺼내어 먼지를 털고 입술에 대었더니 대나무 향이 그윽하였다.
언제나 마음먹으면 빌려 올 수 있었던 도서관에서 대출하였던 책을 아껴가면서 읽었다.
언제 도서관 문이 열려 원하는 책을 마음껏 빌려 올 수 있을까 기다리면서,
전에 사 놓고 밀쳐 두었던 책들을 하나씩 꺼내서 읽는 즐거움을 느꼈다.
더 이상 보관하지 않아도 되는 책들은 재활용 하는 날 버리니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내친김에 서랍 정리. 장롱 정리, 부엌 정리도 하였다.
입지도 않는 옷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유통기간이 훨씬 지난 조미료. 식품들이 많았다.
궁핍한 시대를 살아온 세대여서 버리는 것이 죄악시되고 아까웠는데 정리하고 나니
공간이 훨씬 넓어졌고 전에 보지 못하였던 것도 찾게 되니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 되었다.
이곳저곳 다니는 게 바빠서 일주일에 한 번 문화교실에 나가서 그렸던 그림을
요즘은 거의 매일 집에서 그리게 되었는데 혼자 놀기에 가장 좋은 취미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눈은 높고 손은 무디지만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림을 뭉개고 지난 2월 다녀온 그랜드캐년을 그려 보았다.
조용한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면서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동안 우리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던 것 같다.
복잡한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불편하였고 사소한 일에도 불만이 많았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기보다 내 위주로 생활하였으며 타인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다.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 가까운 집 앞 한강공원으로 자주 나가서 산책을 하였다.
산수유가 피기 시작하더니 매화와 살구가 화사하게 피고 목련도 촛불을 켜듯 피어났다.
개나리에 이어서 벚꽃이 구름처럼 뭉개 뭉개 피더니 복사꽃. 라이락도 다투어 피었다.
빨갛게 피어난 명자꽃, 영산홍 무더기를 바라보니 그 화려함속에 어떤 슬픔을 느낀다.
찬란한 봄의 환희 속에 숨어 있는 어떤 어두운 그림자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 기쁨을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내일이면 어느 시인이 노래한 '빛나는 꿈의 계절,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인 4월이 된다.
부활과 함께 전 세계의 사람들이 불안과 위기에서 벗어나 찬란한 4월을 맞이할 수 있길 기도한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의 서울숲(튤립. 수선화) (0) | 2020.04.12 |
---|---|
현충원의 수양벚꽃 아래서 친구를 만나다. (0) | 2020.04.02 |
경복궁의 굴뚝과 꽃담 (0) | 2020.03.25 |
봄꽃으로 물든 창경궁 (0) | 2020.03.25 |
창덕궁의 봄 (0) | 2020.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