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지난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하였고, 짐을 풀어 챙겨 넣고
나니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오래만의 내 침대에 누우면서 빙긋 웃었다.
이렇게 편안하고 정겨운 내 침대를 두고
그동안 낯선방, 낯선 침대속에 누우면서 얼마나그리워 하였던가?
그러면서 또 머지 않아 떠나고 싶어하는 이 병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침에 일어나니 도대체 무슨 일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모르겠다.
일주일 남짓의 주부 공백이 이렇게 큰 것일까?
빨래는 넘쳐 나고, 화장실에는 곰팡이가 자라고 있고,
가구에는 먼지가 하얗게 앉아 있고, 냄비속에는 먹다 남긴 음식이
부패하고 있고, 꽃들은 시들어 가고 음식 쓰레기에서 나오는 냄새들.....
그러나, 그동안 집 비우게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껴안아 주고
싶은 내 남편과 딸이다.
딸 아이는 엄마가 없는동안에 교내 글짓기 행사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책상위에 상장까지 펼쳐 놓아 더 기쁘게 하였다.
이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으니, 하나씩 본래 자리로 되돌려야 할 것이다.
하기야, 집안일 하기 좋아하지 않으니 본래의 자리도 비슷할테지만.....
5월 30일
그동안 간절히 바랬던 터키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써 가슴은
벅차기만 하였다.
생각날 적마다 하나씩 챙겨 넣은 가방은 부풀대로 부풀어 더 이상 빈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이곳 마산에서 인천까지 가는 길은 시외버스를 이용하였다.
4시에 가이드와 3층 만남의 장소에서 제일 늦게 체크하고, 곧바로
5시 30불발 이스탄불행 대한항공에 올랐다.
이스탄불.
뽀죡한 첨탑과 지중해의 푸른바다위를 떠 다니는 유람선, 이슬람 사원.
나에게 너무나 호기심을 주던 그 이스탄불로 내가 정말 가는 것인가?
창가의 자리에 앉게 되어 인천항을 내려다 보니
공항은 안개속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부터 시간을 6시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구나.
(7시 차이지만 지금은 섬머타임 기간이라 6시차)
12시간의 비행이 끔찍하기만 하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제일 힘든 것은 장시간 비행기 속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잠자리가 바뀌면 거의 잠을 못자는 편이라 조금 졸다가는 또 깨곤한다.
그동안 잘 하지 않았던 묵주기도를 계속 하면서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어느새 활짝 개이고 하얀 구름이 동동 떠 다닌다.
유독 한덩이 구름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마치 외로이 떠도는 내 영혼을 만난 듯 하다.
아래를 바라보니 중국의 칠리만의 푸른 물결이 반짝인다.
내팔에 있는 시계는 7시가 넘었는데도 하늘의 해는 아직 중천에서 약간 비껴 있을 뿐이다.
전광판을 바라보니 시속 830킬로미터/h
고도 10820m위의 상공을 날고 있다.
창밖을 내다 보니 끝없는 사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벌써1시간을 넘게 이런 사막을 날아온 것 같다.
비행기로 나르는 이길을 전에는 낙타를 타고 다녔구나.
사막속의 캐러반 대열을 생각하니, 난 참 편하게 이 사막을 건너는 구나. 생각된다.
아마도 고비 사막인 모양이다.
지도위의 우리 비행기는 우랄산맥을 넘고 있는 듯 하였다.
서쪽으로 향하는 비행기였으므로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었다.
곧 약간 도톰해진 초승달이 나타났다.
하늘에 떠 있으면서 바라보는 초승달은 또다른 감회였다.
사랑스런 달아, 안녕. 고마워. 혼자서 달을 보고 인사를 건냈더니
초승달도 날 알아보는 듯 파르르 떠는 웃을을 보내주었다.
캄캄한 흑해를 나르면서 저녁 식사를 하고, 1시간 후
드디후 이스탄불도착.
아~! 이곳이 그렇게 가슴 설레던 그 이스탄불인가?
옆좌석에 앉은 인연으로 67세 부인과 한방을 쓰게 되었다.
이스탄불은 구시가 전체가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에 도로를 넓힐 수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투숙하기로 한 호텔입구가 차들로 막혀 있어, 하는 수 없이 큰도로에서
내려 짐을 끌고 호텔로 들어가야만 하였다.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구름
외로이 떠도는 내영혼을 닮은 구름 한송이.(아래는 끝없이 펼쳐진 고비 사막)
아름다운 일몰의 시각 하늘빛이 너무 아름다웠다.(아래는 우랄 산맥)
호텔 계단마다 있는 성소피아 성당의 성모자상 모자이크 그림과 나자르부적.
이곳에서 종교의 혼합을 벌써 느낄 수 있었다.
이 좁은 도로를 전철과 버스 자동차,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혼란속의 질서를 보는 듯. 다음날 새벽에 나가본 호텔앞 도로.
지난 밤 잠자리가 바뀌어 오래동안 뒤척였다.
룸 메이트 언니는 곧 잠이 들어, 코고는 소리 요란하였는데
때로는 저러다 숨이 막히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로컬 가이드 이영애씨가 이스탄불은 위험한 곳이니 절대
혼자 아침 산책이나, 저녁 늦게 쇼핑 다니는 일은 하지 말라고
주의를 하였는데, 어떻게 내가 아침 산책을 빼먹겠는가?
디지털 카메라와 10$를 호주머니에 챙기고 6시에
호텔 안내서 한장을 들고 산책을 나섰다.
이스탄불은 터키 인구의 1/5, 1700만이 사는 제일 큰 도시이다.
수도는 앙카라로 옮겼으나, 긴 세월동안 수도였기에
지금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도시이다.
전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던 세계사속의
바로 그 도시이다.
골목의 도로는 로마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듯, 벽돌 모자이크였다.
이스탄불은 흑해, 마르마라해, 보스포르스해협, 골든혼.
바다로 둘려 쌓인 도시였다.
호텔을 나서자 바로 영화 '오리엔탈 특급열차'에 나왔던 그 역앞이다.
이른 아침이기에 상점은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고,
도로변에 신문을 나누고 배부 준비를 하는 사람만 보인다.
가이드가 위험하다고 하였기에, 될 수 있는 한 시선을 먼곳에 두고 걸었다.
그러나, 그곳의 사람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먼저 인사를 건네기에
나도 지난밤 배운대로 "구나이든!"하고 인사 하였더니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는다.
어제 저녁 조명을 받고 있던 그 첨탑을 찾아서 갔다.
비둘기떼만 가득하고 조용한 그곳에, 한 무슬림이 계단위 문앞에서
절을 하며 기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사원의 문이 열리지 않았을까?
그 사원 앞은 바로 강처럼 보이는 바다였다.
아직 청소전인지 사방이 지저분하다.
나중에야, 그곳이 바로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다리역활을
하는 여객선 터미널이라는 걸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배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낮에는 많은 인파로 넘쳐나는 그곳이, 새벽에는 갈매기만 나르는 곳이었다.
너무 호텔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다시 되돌아 걸어나와
도로를 건너 아까 그 사원(이레네사원)으로 돌아갔다.
사원 옆구리에는 수도꼭지가 주루룩 달려 있었는데,
한 청년이 커다란 생수통에 물을 받고 있었다.
이곳은 석회분이 많아, 생수를 마실 수 없다고 하였는데, 저 병의
물은 왜 받아가는 것일까?
가까이 다가가니 환하게 웃는데, 아주 미남 청년이었다.
나보고 이렇게 꼭지를 틀어라고 가르쳐 준다.
그곳에서 사원에 들어가기전 몸과 마음을 씻는 장소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거의 한시간 가까이 지났기에 호텔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이 안된다.
한국에서도 '길치'였기에 몇번씩이나 확인하고 걸었는데.....
역까지는 찾았는데 그다음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하는 수 없이 호텔 안내서를 길가는 차도르 차림여인에게 물었더니 모른다고 한다.
어쩌나. 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차를 탄 남자분이
차를 세우고 안내서를 보여 달라고 한다.
우리가 묶은 호텔은 아주 조그만 호텔이고, 그런 조그만 호텔이
역 주변에 수없이 많았다.
차속의 남자가 이쪽으로 쭉~가라고 가르쳐 준다.
조금 더 가서 뚱둥한 남자에게 물었더니,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가면서
길을 안내해 주었다.
무섭다고 한 터키 사람들이 이렇게 친절하다니!
나는 "싸올!" 인사를 건네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안 도로 바닥은 이렇게 모자이크 벽돌로 단단하게 만들어 졌다.
아침 햇살아래 서서히 깨어나는 성이레네 사원.
이 뽀죡 첨탑들이 바로 나를 터키로 이끌었던가?
건너편이 아시아라고 한다. 이른 시간이어서 조용하기만 한 여객선 터미널.
걸음을 되돌려 다시 찾아간 이레네 사원, 한쪽 첨탑은 보수 공사 중인 모양이다.
이곳에 앉아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모양이다.
이 청년이 나에게 보여준 환한 미소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사원,
막 출근준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모습.
아침 식사를 끝내고 터키의 수도 앙카라로 떠나기 전 톱카프 궁전관광을
먼저 하기로 하였다.
매주 화요일이 휴일이기에 (우리가 이스탄불 관광하기로 한 날이 바로 화요일이기에)
먼저 들르고 앙카라로 향한다고 하였다.
톰카프 궁전은 오스만 터키의 술탄이 거주하였던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궁전이었다.
슐탄 1세 부터 34대까지의 궁전이었다고 하던가?
(오스만 터키는 1923년 터키로 다시 독립하기전 36대 슐탄까지 이어 내려온
왕조라고 현지 가이드가 설명하였는데, 내 기억이 맞는지?)
우리나라 조선의 역사와 너무나 흡사하다고 한다.
톱카프궁전이 경복궁이라면, 돌마바흐체궁전은 덕수궁과 같다고 할까?
백성들은 과중한 군역과 세금에 허덕이었을테고,
권력을 잡은 슐탄을 자기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형제들을 죽이기까지 하면서
환락과 방탕에 젖어 지냈을 것이다.
궁전 내부에 부장된 그 영롱하고 화려한 보석들은 다 어디에서 나왔을까?
우리들이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는 화려한 장신구와 집기들은
백성들의 눈물과 한숨인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찻잔, 장신구, 보석이 박힌 칼,...모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 안의 보석만 제대로 팔아도 터키는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어떤 왕국도 가장 번성한 시기를 지나면 곧 몰락으로 치닫는 모양이다.
왕국의 말기로 오면서 더욱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부패해지기 쉬운 법인가?
슐탄 36대 멸망과 함께 국부 아타 투르크가 독립돤 터키를 세우고
부패한 이스탄불이 지긋지긋하여 앙카라로 수도를 옮겼다고 하였다.
곳곳에 국부의 동상이 서 있었고, 그들의 새 화폐에도 아타 투르크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케말 파샤 아타 투르크는 터키인에게 거의 신적인 존재라고 한다.
터키문자를 새로 만들고(알파벳을 본딴 문자 같았다),
성을 만들었으며, 세제개혁을 하여 백성의 부담을 들어 주었다고 한다.
가난한 산골 소년이 자라서 아타 투르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가이드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 가이드는 29살의 아가씨인데, 어찌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열심히 귀기울여 듣고, 메모까지 하였으나, 며칠 지나니 아물아물 하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까지 6시간의 버스 이동(약 380Km)을 하여야 했다.
보스포르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가는 길에는 다리가 두개 놓여 있는데
우리는 제2다리를 통행료를 내고 건너갔다.
1988년 터키와 일본의 기술 합작으로 현수교를 만들었는데
폭이 가장 좁은 (700m)곳, 물살이 가장 빠른 곳위로 지나갔다.
이 다리 하나를 건넘으로써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겨가는 셈이었다.
톱카프 궁전 입구.
이곳의 학생들도 견학을 온 모양이다. 교복을 입고 재잘대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어찌나 반가워 하면서 "코레아"를 연발하는지....
초등학생들은 더욱 친근하게 우리에게 손까지 흔들면서 반겨 주었다.
궁전 입구
금으로 도금된 궁전내부의 천장.
회랑을 지나서 부엌과 식당이 연결되어 었다.
차도르를 쓰고 긴의자에서 쉬고 있는 이곳의 여인들은 거의가 뚱둥한 몸이었다.
혹시 이곳은 미인이 뚱뚱한 여인이 아닐까?ㅎㅎ
골든 혼을 바라보며 스카프를 두른 여인들도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화려한 터키의 타일. 거의가 푸른빛( 페르시안 블루)
아름다운 타일로 장식된 방문앞.
나의 룸메이트 부인(아주머니, 언니라고 불려주기를 바람)
궁전앞의 장미꽃밭.
바그다드 궁전.
금으로 도금된 창살문.
입구를 지키는 경비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였더니 흔쾌히 포즈를 취해 주었다.
궁전앞의 히포드럼광장의 8각지붕 독일의 분수.
궁전앞의 기념품가게.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이곳 궁전앞 히포드럼 광장에 서 있었는데, 아래 부분과 윗부분이 따로
운반하여 이곳에서 연결한 모양이었다.
오벨리스크와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는 또 다른 기념탑.
이집트에 잇는 줄 알았던 오벨리스크앞에서.
세계문화유산인 갑바도키아의 암굴괴석과 지하 동굴 도시(데린구유)로
가는 길은 참으로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척박해 보이는 그 땅은 들꽃들의 차지인 것 같았다.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속의 들꽃잔치.
특히 새빨간 양귀비 꽃들이 어찌난 아름다운지, 그곳에 내려서
꽃밭을 좀 거닐어 보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조금 후 바다같은 호수가 나타났는데, 호수주변이 하얀빛깔이었다.
바로 소금 호수라고 하였다.
이곳의 천일염으로 터키국민의 소금으로 다 사용할 수 있는 양을
채취한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염전만 보아왔던 나에게는 정말 자연의 선물같았다.
이곳의 들판에는 일하는 농부를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넓은 들판을 모두 기계로 농사를 짓는 모양이었다.
새삼 집약형인 우리 농촌의 농민들의 생활이 안타깝게 여겨졌다.
이곳은 그냥 씨만 뿌려 놓아도 곡식이 저절로 자라고
밀이 잡초와 함께 자라도, 그걸 일일히 제거 하지 않고
추수때 그냥 기꼐로 수확을 하는 모양이었다.
데린구유란 깊은 우물이란 뜻이라고 했다.
그 지하 동굴 도시속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었을까?
깊이가 20층의 높이로 파 들어 갔는데,
관람을 할 수 있는 곳은 1/10정도라고 하였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동굴속에서 생활하였다 하니
신앙의 힘은 얼마나 강한가?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지하에서 나오니, 조잡한 인형을 만들어 파는 아이들이 우리를 에워싼다.
전혀 예쁘지 않은 그들의 인형을 하나 사들고 버스에 올랐다.
그 다음 우리가 간 곳은 용암과 화산재가 굳어 만든 기암괴석이
즐비한 괴뢰메 야외 공원.
정말 신의 예술작품을 우리앞에 펼쳐 놓은 듯 하였다.
이곳에서 난 미아가 될 번하였다.
기념품 가게안에 들어가 딸의 셔츠와 내 셔츠를 15$에 흥정하고 나왔더니
우리가 타고온 버스와 일행이 나만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가게에는 그곳 주민인 남자들뿐.
내 상황을 눈치챈, 주인이 오토바이를 타라고 하였다.
순간 망설였다.
이러다가 내가얼마전 뉴스에 나온 그 여학생 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끌려 가서 돈과 목숨을 빼앗기는 게 아닐까?
그냥 그곳에서 기다리려고 하는데, 묘한 모험심이 생겼다.
그냥 그들을 믿고 싶었다.
그 남자의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조금 달리니 낯익은 푸른빛 버스가 되돌아 오는게 보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한쪽팔을 휘저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참 아찔한 순간인 것 같았다.
어쩌자고 난 위험하게 그남자의 오토바이를 탔을까?
그들의 순진한 눈빛과, 알라신의 가호를 믿은 탓이었을까?
이 모험담은 가족에게는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할 특급비밀이다.ㅎㅎ
동굴을 파 들어가 만든 데린구유.
먼지가 풀풀 날리기만 하는 밭사이로 오래만에 파란 강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가롭기만 한 들판.
수많은 성화가 그려진 암굴교회.
괴뢰메 야외공원안의 수도자들이 수도를 하였던 곳.
괴뢰메는 너희가 볼 수 없는 곳이란 뜻.
한국에서 같이 간 가이드와 함께.
참 예쁜 목소리, 차분한 성격의 친절한 아가씨였다.
척박해 보이는 곳에도 들꽃들은 예쁘게 피어 있었다.
바로 저끝의 가게에 들어가 나는 미아가 될뻔 하였다.
괴뢰메 암굴교회 앞의 파란 버스가 나를 버리고 떠나간 버스다.
나를 떨쳐놓고 간 버스는 터키 보석 판매장으로 달려갔고, 뒤늦게 도착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버드나무 아래에서 현지인 아저씨와 팔짱을 끼고 즐겁게
웃으며 무사 귀한을 자축하였다.
눈앞에 펼쳐진 신의 예술작품들.
나를 다시 찾아 차를 되돌려 온 마음씨 좋아보이는 운전 기사 아저씨.
뒤로 낙타바위를 등지고 기념 사진.
요정 스머프의 집들처럼 보인다.
사막같은 땅에서 이렇게 포도나무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자꾸 되돌아 보고 싶은 하늘을 향해 있는 물개모양의 암석들.
어느 수도자가 만든 교회의 입구인지?
세계문화유산인 갑바도키아의 암굴괴석과 지하 동굴 도시(데린구유)로
가는 길은 참으로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척박해 보이는 그 땅은 들꽃들의 차지인 것 같았다.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속의 들꽃잔치.
특히 새빨간 양귀비 꽃들이 어찌난 아름다운지, 그곳에 내려서
꽃밭을 좀 거닐어 보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조금 후 바다같은 호수가 나타났는데, 호수주변이 하얀빛깔이었다.
바로 소금 호수라고 하였다.
이곳의 천일염으로 터키국민의 소금으로 다 사용할 수 있는 양을
채취한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염전만 보아왔던 나에게는 정말 자연의 선물같았다.
이곳의 들판에는 일하는 농부를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넓은 들판을 모두 기계로 농사를 짓는 모양이었다.
새삼 집약형인 우리 농촌의 농민들의 생활이 안타깝게 여겨졌다.
이곳은 그냥 씨만 뿌려 놓아도 곡식이 저절로 자라고
밀이 잡초와 함께 자라도, 그걸 일일히 제거 하지 않고
추수때 그냥 기꼐로 수확을 하는 모양이었다.
데린구유란 깊은 우물이란 뜻이라고 했다.
그 지하 동굴 도시속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었을까?
깊이가 20층의 높이로 파 들어 갔는데,
관람을 할 수 있는 곳은 1/10정도라고 하였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동굴속에서 생활하였다 하니
신앙의 힘은 얼마나 강한가?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지하에서 나오니, 조잡한 인형을 만들어 파는 아이들이 우리를 에워싼다.
전혀 예쁘지 않은 그들의 인형을 하나 사들고 버스에 올랐다.
그 다음 우리가 간 곳은 용암과 화산재가 굳어 만든 기암괴석이
즐비한 괴뢰메 야외 공원.
정말 신의 예술작품을 우리앞에 펼쳐 놓은 듯 하였다.
이곳에서 난 미아가 될 번하였다.
기념품 가게안에 들어가 딸의 셔츠와 내 셔츠를 15$에 흥정하고 나왔더니
우리가 타고온 버스와 일행이 나만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가게에는 그곳 주민인 남자들뿐.
내 상황을 눈치챈, 주인이 오토바이를 타라고 하였다.
순간 망설였다.
이러다가 내가얼마전 뉴스에 나온 그 여학생 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끌려 가서 돈과 목숨을 빼앗기는 게 아닐까?
그냥 그곳에서 기다리려고 하는데, 묘한 모험심이 생겼다.
그냥 그들을 믿고 싶었다.
그 남자의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조금 달리니 낯익은 푸른빛 버스가 되돌아 오는게 보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한쪽팔을 휘저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참 아찔한 순간인 것 같았다.
어쩌자고 난 위험하게 그남자의 오토바이를 탔을까?
그들의 순진한 눈빛과, 알라신의 가호를 믿은 탓이었을까?
이 모험담은 가족에게는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할 특급비밀이다.ㅎㅎ
동굴을 파 들어가 만든 데린구유.
먼지가 풀풀 날리기만 하는 밭사이로 오래만에 파란 강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가롭기만 한 들판.
수많은 성화가 그려진 암굴교회.
괴뢰메 야외공원안의 수도자들이 수도를 하였던 곳.
괴뢰메는 너희가 볼 수 없는 곳이란 뜻.
한국에서 같이 간 가이드와 함께.
참 예쁜 목소리, 차분한 성격의 친절한 아가씨였다.
척박해 보이는 곳에도 들꽃들은 예쁘게 피어 있었다.
바로 저끝의 가게에 들어가 나는 미아가 될뻔 하였다.
괴뢰메 암굴교회 앞의 파란 버스가 나를 버리고 떠나간 버스다.
나를 떨쳐놓고 간 버스는 터키 보석 판매장으로 달려갔고, 뒤늦게 도착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버드나무 아래에서 현지인 아저씨와 팔짱을 끼고 즐겁게
웃으며 무사 귀한을 자축하였다.
눈앞에 펼쳐진 신의 예술작품들.
나를 다시 찾아 차를 되돌려 온 마음씨 좋아보이는 운전 기사 아저씨.
뒤로 낙타바위를 등지고 기념 사진.
요정 스머프의 집들처럼 보인다.
사막같은 땅에서 이렇게 포도나무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자꾸 되돌아 보고 싶은 하늘을 향해 있는 물개모양의 암석들.
어느 수도자가 만든 교회의 입구인지?
지난밤 밸리댄스를 포함한 민속공연을 보려 갔었는데,
전혀 냉방 시설을 하지 않았는데도, 실내는 몹시 추울 정도였다.
무용수들의 몸동작도 엉성하였고,
멋내고 엷은 투피스 정장을 입고
파티장 가듯이 따라 나선 것을 한참 후회할 정도로 추웠다.
아침에 또 4시간을 달려 콘야로 향하였다.
버스속에서 현지 가이드 이양은 이슬람교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나는 카톨릭 신자이지만, 이슬람교에 대한 호감이 참 많은 편이다.
이번 여행에서 하루에 다섯번 알리는 기도신호가 참 인상적이었다.
집에 돌아올적 코란 경전 읽는 걸 녹음한 음반을 사 올 정도로
그 경전 읽는 음률을 좋아한다.
전생에 나는 이곳 서남 아시아 사람이었을까?
콘야로 가는길은 바로 실크로드에 속하는 길이라고 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위로 쭉뻗은 외길을 끝도 없이 달린다.
창박을 쳐다보며 묵주기도를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하는 내눈에
버스창밖으로 무언가 하늘하늘 날아 다니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무엇일까? 꽃가루인가?
하고 바라 보았더니 수많은 나비떼들이었다.
이 나비들은 어디서 어디로 날아가는가?
그러다가 열어 놓은 차창으로 들어 오기까지 하였다.
길가의 성채처럼 보였던 허물어져 가던 그 건물이 바로 상인들의 숙소였다.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캐러번 숙소가 있기에 잠깐 쉬었다 갔다.
숙소는 낙타가 피곤할 무렵인 40Km간격으로 있다고 한다.
사람과 낙타가 쉬었다 가는 캐러반을 그대로 이용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큰 화덕앞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빵굽는 아저씨가 보이는 곳에 앉아
그가 열심히 구워내는 빵을 먹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는 듯 손놀림이 경쾌해 보였다.
콘야는 터키의 5대도시에 속하는 도시인데, 가장 이슬람의 문화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라고 한다.
5개의 대학이 있는 교육도시인데, 거리의 여자들은 거의 검은 차도르를
단단하게 무장하고 걸어 다니는 모습이었다.
이슬람은 복종한다는 뜻.
무슬림은 복종하여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콘야의 여인들은 더 이상 법으로 차도르 착용을 권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즐겨 차도르를 차용하고 다니는 것일까?
언제가 차도르를 입고 난 후
진실로 자기로 부터 자유로웠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갑파도키야에서 묶은 호텔안 수영장.
콘야로 가는길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상인들의 숙소.
상인들이 묶엇던 여관의 입구, 조각이 아름답다.
그곳의 주민과 함께.
무슬림들은 이렇게 하얀 구정뜨게질한 모자를 즐겨 쓰는 듯했다.
그곳의 5일장. 우리 시골의 5일장처럼, 야채, 신발, 옷가지들을 펼쳐 놓고 팔고 있었다.
즐거운 표정으로 빵을 굽고 있는 아저씨.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참 맛있었다고
오른손을 가슴 높이에서 흔들었더니, 활짝 웃어 주었다.
타오로스산맥을 넘는 길에 휴게실앞에서.
타오로스 산맥은 인도에서 이탈리야까지 연결된 산맥이라고 했다.
그 타오로스의 정원석같은 하얀 석회석 바위와 앙징맞은 향나무를
보는 즐거움으로 장거리 버스 여행이 즐겁기만 하였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타오로스 산의 봉우리들.
타오로스 산맥을 넘어 안탈랴 지중해 바다에 도착하엿다.
월 3일.
인구 70만의 휴양도시 안탈랴는 200만년전 지중해가 융기한 지역이라고 한다.
페르가뭄왕 안탈로스2세가 이 도시를 건설하였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안탈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를 지중해 해안에 풀어놓자, 모두 오~지중해!
감탄을 쏟으며 해변으로 달려갔다.
이곳 안탈랴는 유럽인들이 즐겨찾는 휴양지이기에
여름 한철에만 인구가 수없이 불어나 방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해변에는 모래사장인 아닌 조그만 조약돌 해변이었다.
그곳의 보석처럼 조그맣고 이쁜 돌멩이를 주워 백속에 넣었다.
다음에 지중해의 파란 물이 그리운 날 이 조그만 돌을 꺼내 보고 싶어서.
유도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버들 유, 복숭아도. 이름처럼 아름다운 꽃이었다.
이곳에서 하얀 유도화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지중해의 유람선을 타보기로 하였다.
일정에 없는 상품이었기에 일인당 20$을 갹출하여서
전세 유람선을 타기로 하였다.
에메랄드 물빛이었는데 해안의 단구가 멋지다고 하였지만,
내눈에는붉고 묽은 밀가루 반죽이 죽죽 쳐져 내린 느낌이었다.
일명 '라라폭포'라고 불려지는 장관을 보고 배를 되돌렸다.
배타기 전에 보았던 구시가지가 더욱 호감이 가고 아름다웠다.
그곳에 우리가 즐겨읽은 동화책 '팔려간 당나귀'를 쓴
나스레띤 호자(선생님)의 나귀를 거꾸로 타고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이 그 호자의 출생지인 모양이었다.
고대 로마의 번영을 나타내는 하드리안문을 보고
좁은 골몰길이 이어진 구시가지는 참 정겹기만 하였다.
듀렌폭포도 일정에 없었지만,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가 보았다.
원시림은 마치 타쟌이 불쑥 "아아아~'외치며 나타날 것 같았다.
옥색의 맑은물은 미네랄이 풍부하여 그대로 식수로 사용해도 될 정도라고 했다.
폭포에서 멀리 떨어져 기념사진을 찍는데도
안개같은 포말이 얼굴에 떨어져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듀렌 폭포를 뒤로하고 다음 여행지 파묵칼레로 향하였다.
몸은 피곤하였지만, 마음은 또다시 파묵칼레에 대한 호기심으로 벅차기만 하였다.
지중해에 발을 담그고 환호성을 지른 우리들.
해안에는 자잘한 보석같은 조약돌들.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서서히 밤을 맞이하는 지중해.
곧 밤의 콘서트가 시작될 모양이다. 아기를 조율하고 있는 거리의 악사들.
유도화가 아름답게 핀 벤치에 앉아서.7공주중의 세분과 함께.
석양에 물든 안탈랴 마을.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 현지인 가이드 뱃심. 36살의 노총각이라고 하였다.
안탈랴의 구시가지. 종려나무가 무성히 자라는 곳에서 '꼬끼오~" 아침을 알리는 닭소리가
울릴듯 한 마을이엇다.
터키석 보석으로 치장한 이블리 미나레.
구시가지안의 정겨운 골목안 풍경.
해안 단구위에 즐비한 아파트단지.
라라폭포앞에서 즐거운 한때. 곁의 사람들은 광주에서 올라온 7광주중의 3사람.
라라폭포.
유람선들이 즐비한 구시가지.
멀리 안탈랴의 상징인 이블린탑이 보이는 곳에서.
시대를 거슬러 간듯한 구시가지. 이곳 상점에서 난 "핸드 메이드"라고 자랑하는
가짜 터키 목걸이를 단돈 5$을 주고 샀다.
로마의 번성을 말해주는 하드리안 문. 아래는 마차가 지나다닌 움푹 패인 흔적이 있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하드리안문의 문양. 도리아식 건축.
옥을 풀어 놓은 듯한 맑은 듀렌폭포아래의 물.
포말이 얼굴에 가득 날아드는 듀렌폭포앞에서. 뒤의 분홍빛깔의 옷을 입은 여인은
우리일행인 7공주중의 부산 의사선생님.
파묵칼레는 지도상에는 데니즐리로 나타나 있다.
가는 도중 우리의 충실한 파란 버스가 고장이 났다.
동그란 모양의 소나무들이 즐비한 타오로스 산맥을 넘어가는 중에.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운전 기사와 보조 기사가 땀을 흠뻑 흘리면서
수리를 하여 다시 에어컨이 가동되고 출발을 하였다.
흰셔츠가 기름에 검게 변한 옷을 입고
다시 운전을 하는 그에게 손뼉을 쳐주었다.
하필 그늘도 없고 들꽃도 없는 곳에서 고장이 났기에
우리는 모두 꼼짝도
못하고 버스안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이스람 무슬림이 꼭 지켜야 하는 5계명.
1, 유일신 알라시능 믿을 것.
2,하루에 5번 기도할 것.
3, 라마단 금식기간을 지킬것.
4,일생중에 성지순례를 할 것.
5,구휼,희사할것.
기독교의 10계명과같은 계명같았지만
요즘 터키에서는 그 5계명을 다 지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기도를 알리는 시각에 얼굴을 내밀어 보았지만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터키의 인사법은 서로 껴안고 양쪽 볼을 서로 맞대는 인사법이었다.
화를 내고 싸움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들은 타인에게도
나의 꿀(발름), 설탕(쉐케림)이라고 호칭을 하는 모양인데
어떻게 그렇게 부르는 사람과 화를 내고 싸울 수 있겠는가?
파묵칼레로 가기전 우리들은 싸이프러스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히에라 폴리스 유적지부터 둘려 보았다.
히에라 폴리스는 죽은자들의 도시라고 하였다.
성안은 네크로 폴리스, 성밖은 히헤라 폴리스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히에라 폴리스에는 3종류의 고분이 있는데,
1석관식,
2주거식.
3 봉분식이었는데 이곳은 중국왕족들이 병 치유차 파묵칼레로
여행와서,
결국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아닌가?
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나는 특히 황량한 히에라 폴리스가 마음을 이끌어
혼자서 먼지를 풀풀 날리며 죽은자들의 무덤사이를 걸었는데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얼른 버스로 되돌아갔다.
타오로스 산맥을 넘는 중 버스가 고장났다.
들판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야생 양귀비가 붉게 피어 시선을 빼앗았다.
아름다운 '살다'호수. 토파즈 보석같은 물빛이 너무 아름다웠다.
호숫가의 양귀비꽃들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드리고 싶었다.
호수가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한번 창밖으로 한컷 더.
죽은자들의 도시 히에라 폴리스 입구.
열주뒤로 줄지어 서있는 싸이프러스나무들.
네크로 폴리스 입구앞에서 민예품을 파는 여인.
하드리안 문을 만든 하드리안 황제를 기리기위한 탑의 기둥.
이 거대한 도시는 지진으로 매몰되었다가 발굴되엇다고 하는데,
정말 그때의 건축 기술이
오히려 지금보다 앞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데니즐리(바다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파묵칼레.
고대 온천이 있는 곳이었기에, 숱한 불치병의 환자들이 찾은 석회온천장이다.
파묵칼레(목화의 도시)로 가는 중에 목화를 따는 순박의 처녀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정겨운 마을들을 볼 수 있엇다.
한 마을에는, 지붕에 유리병을 세워 두었는데,
어떤집은 하나, 또 다른 집은 둘, 셋.
어떤집은 병이 깨어져 있는 모습의 특이한 마을을 지나쳤다.
그 병은 바로 과년한 딸이 있으니 지참금을 가지고, 딸을 데려가라는
신호라고 하였다.
깨어진 유리병은 딸이 이제 출가하였다는 표시라고 하니 얼마나 정겨운 마을인가?
파묵칼레의 옥색물빛은 석회석의 이산화탄소와 칼슘이 만나 만들어 낸 물빛이라고 했다.
그 옥색 물빛 석회붕 노천 온천에, 전에는 직접 온천을 하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은 관광객으로, 그냥 발만 담그고 돌아와야만 했다.
뚱뚱한 뱃살을 다 드러내 놓고 아이들을 껴안고 노천 온천을 하는 여인들도 있었다.
버스속에서 가이드 이양이 한국 음식, 특히 라면이 먹고 싶다고 하기에,
난 혹시나 하고 가져간 컵라면 두개와 고추장, 멸치볶음을 저녁에 주었다.
어느 나라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내 식성은 그런 한국 음식 한 여흘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식당안에서도 될 수 있는 한 밥은 먹지 않고, 현지 음식과 과일만 열심히 먹었다.
터키는 특히 과일이 풍부하여 체리와 살구를 실컷 먹는 즐거움을 누렸다.
길가에 파는 체리가 1키로그램에 4$, 씻지도 않고 그냥 먹었다.
농약을 치지않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사실일까? 걱정되네....
호텔 마당에 있는 노천탕에 들어갈려고 수영복을 입었더니,
오래전 사 두었다가 꺼낸 옷이기에 쭈욱 늘어나 헐렁헐렁 하엿다.
같이 간 사람들이 수영복이 너무 큰 것 아닌가? 하고 놀렸다.
(어제 백화점 갔더니, 마침 수영복 특별 할인을 하여 비키니 수영복을 새로 샀다.ㅎㅎ)
식사를 끝내고,야외식당에서 터키의 발리댄스가 벌어졌다.
옛날, 슐탄을 홀린 여인들의 현란한 배꼽춤.
차도르로 단단히 몸을 감싼 여인들속에서, 어떻게 저렇게 선정적인
춤을 출 수 있단 말인가?
여성인 나도 어느새 흥분시키는 춤인것 같았다.
수영장옆의 긴의자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 보았더니
하얀 반달이 고요히 떠 있었다.
이곳의 하늘은 유난히 청명하여, 밤마다 하늘의 달을 볼 수 잇었는데
유난히 더 마음을 흔들어 놓는 달빛이었다.
슬그머니 두고 온 딸생각이 났다.
내 딸도 어쩌면 지금 저 달을 보면서 날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눈물이 반짝~! 달빛에 젖어 흘려 내렸다.
저 아래 고여있는 수영장 물빛이 너무 곱다.
두아이를 데리고 수로에 앉아 온천을 즐기는 여인.
하얀 석회석이 하얀 눈같다.
흰눈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듯 한 석회석 온천탕.
기대하였던 대로
에베소에는 너무 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기에
나누어서 기록해야 하겠다.
하드리안신전, 셀수스 도서관, 거대한 원형극장 아고라,
예수님의 사후
요한이 모시고 간 마리아와 함께 살았던 장소 등등....
너무나 많은 유적지를 어떻게 다 소화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크레데스와 대리석도로가 마주하는 곳에 위치한 셀수스 도서관은
2세기 로마의 집정관이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고 했는데,
도서관 입구에 지혜와 미, 사랑을 상징하는 4여신상이 서 있었지만,
실물은 모두 대영박물관으로 옮겨가고, 이곳에 세워진 것은
시멘트와 철골로 다시 만든 모조품이어서, 실망하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서늘하여 통풍이 잘 되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책은 어떤 것이엇을까? 양피지 두루마리? 상상해 보았다.
도서관 앞은 아이러니하게도 창녀촌이 있었으니,
학문과 성은 어떤 관계에 있는 걸까?
그 옆의 24000명을 수요할 수 있는 거대한 원형극장 아고라.
그 당시의 영화를 한눈에 느끼게 해 주었다.
이곳에서 영화 속 장면처럼 사자를 풀어 놓아
죄수들을 잡아 먹는 구경을 하엿을까?
항구를 통하여 들어온 각 상품들을 파는 시장이 즐비한 이곳에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도
향료와 화장품을 사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그 당시 클레오 파트라는 로마의 안토니오와 연애를 하엿을까?
시저와 달콤한 밀월 여행을 하엿을까?
고대 도시를 한바퀴 돌았더니, 어느덧 등과 가슴에 땀이 솟아
시원한 그늘을 찾게 하였다.
언덕위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는
번영과 화려함이
길가의 풀잎과 무엇이 다를까?
파란하늘에는 점점 부풀어 오른
하얀 반달이 가만히 날 지켜보고 있었다.
(난 왜 이곳 터키에 와서도 이렇게 달이 좋은지 모르겠다)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옷주름
트라잔 분수앞.
어디에나 피었다가 지는 이 야생 양귀비꽃이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셀수스도서관 앞의 창녀촌.
멀리 보이는 것이 셀수스 도서관.
귀족들의 주택.
하드리안 신전.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한 현관.
도서관 가는 대리석도로.
거의 원형상태로 복구한 셀수스도서관.
이 여신상은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모조품이었다.
도서관 옆 시장거리.
대리석에 조각된 잔문양.
문을 닫아 놓아 들어갈 수 없는 곳,
이상이 바로 아르테미스여신상인가?
(창살 사이로 찍은 사진)
옛시장의 규모를 말해주는 잔해들.
24000명을 수용할 수 잇는 아고라.
멀리서 바라본 아고라 정면.
아고라 앞에서.
부서진 아르테미스 신전터.
성요한이 마리아와 함께 보냇다는 성모 마리아의 집은 가 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돌아서야 했다.
터키의 3대 도시인 이지미르를 지나,
에게해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트로이의 유적이 있는 아이발릭을 향해 달렸다.
디지털 카메라 전원도 거의 끝나가고
메모리 잔량도 얼마남지 않았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꼭 필요한 장면만 아껴가면서 샤터를 눌렸다.
여행일정도 거의 끝나가고,
'에게해의 진주'라는 노래도 있는 이곳의
바다에서 1시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거의 해는 기울어 가는 때였으므로
해변에는 수영하는 사람도 별 없었다.
저곳 다리가 놓여있는 곳 까지 걸어가 보자고
룸메이트 언니를 부추겼다.
맨발에 찰랑이는 에게해의 물결.
하얀 모래.
걷어올린 바지가 하얗게 부서져오는 물결에 적셔도
즐겁기만 하여 콧노래까지 불렷다.
발밑의 조그만 조개껍질을 주워 가방에 넣었다.
지중해의 조약돌과 함께 오래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방은 2층이었는데,
수영장을 향한곳에 조그만 발코니가 있고,
의자도 두개가 놓여 있어,
그곳에 나가 책을 펼쳤다.
이번 여행에는 거의 책을 읽지 못하였다.
불빛이 흐릿하고 모기떼가 극성을
부려 다시 책을 덮었다.
재즈음악이 흘려나와,
어디서 나오나?하고 내려가 보았으나,
로비에는 아무도 없어 다시 돌아와,
에라~모르겠다 하고 잠을 청하였지만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사랑스러운 딸도
날 그리워하며 잠 못 이루는 것은 아닐까?
슬그머니 여행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6월 5일
트로이의 목마로 잘 알려진 곳으로 향하였다.
지난해 영화로 보았던 '트로이'
어디로 눈길을 주어도 희끄무레한 올리브나무들.
신이 준 커다란 선물이 바로
올리브나무라고 하지 않았던가?
생각했던 것보다 볼품없는 올리브나무였다.
가장 예쁜 여신으로 뽑힌 '아프로디테'가 약속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주겠다는 여인은
스파르타 왕국의 왕비 '헬레네'였다.
영화는 그 '헬레네'를 몰래 빼돌려 트로이로 향하는
꽃미남 '파리스'왕자가 나오는 장면부터 시작되었었다.
영화는
물론 이곳에서 촬영되지 않고, 미국의 세트장에서
촬영하였고, 트로이 목마도 컴퓨터로 처리하였다 한다.
사실 영화를 보고 잔뜩 기대한 사람은 이곳에 와서 실망한다고 하였다.
거대한 성도 없고, 트로이 목마도 보잘 것 없고, 영화에 나왔던
바다도 전혀 보이지않고 황량하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나는 '트로이'영화에서 사랑하는 아들 헥토르가
스파르타 연합군 아킬레우스와 싸우는 장면을 지켜보던
그 장면을 되새겨 보았다.
망루에 올라서서 장남이 싸움에서 죽고,
그 시신을 질질 끌면서
성을 도는 장면을 바라 보아야 했던
부모의 마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깊은 밤 복면을 쓰고 아킬레우스의 진영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아들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하던
프리아모스 대왕의 푸른 눈에 흐르던 그 눈물을 잊을 수 없다.
어릴적부터 '호머'가 쓴 '일리어드'를 읽고,
트로이 유적을 꼭 찾아야겠다는
의지로 결국은 유적을 발굴한 독일의 슐레만과 그의 어린 아내
소피아의 사진이 걸려 있는 박물관을 지나,
흙먼지 보얗게 일어나는
9층의 문화지층을 걸어 탐사하였다.
그 9층 중에서 6층이 바로 트로이시대라고 하였다.
아직 발굴중인 모양인지 차일을 쳐 놓은 곳도 있었다.
어쩌면 발굴이 더 파손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었다.
하얗게 부셔지는 에게해의 물결.
룸메이트 언니와 함께 맨발로 걸었던 해변.
곁으로 지나가는 두 젊은 미녀들.
트로이목마. 광주에서 온 버스에서 항상 같이 앉았던 짝꿍 언니와 함께.
올리브나무 무성한 트로이 유적지.
고대 유적지가 매몰된 9지층 설명.
6지층이 바로 트로이 유적지.
큰 항아리는 시신을 넣어두는 관이었다고 하였다.
고대의 거주지, 우물도 보이고.
이지미르(터키) 출신인 '호머'가 '일리어드' 서사시에 쓴 내용과는 다르게,
역사는 그리스와 스파르타 연합국이 다르다낼스 해협을 건너
트로이를 치고 난후, 승전기념으로 포세이돈 신에게 재물을 바친것이
트로이 목마라고 하였다.
여객선을 타고 게리블루항으로 향하는 길목에
미국에서 터키로 보낸 영화속의 그 '트로이 목마'가 설치되어 있었다.
갤리블루항에 내려 점심을 먹고, 다시 5시간을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로 향하엿다.
너무나 편안한 곡선으로 이어진 들판이었다.
그대로 돌돌 구르고 싶을 정도로 완만한 구릉이 끝없이 이어졌다.
참으로 신의 축복을 받은 기름진 흑토였다.
지금은 누런 밀밭이었지만, 이 밀의 수확이 끝나면, 노란 해바라기밭으로 변한다고 했다.
왼쪽으로는 다르다넬스 해협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메모리가 끝나버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안타까운 장면들이었다.
터키는 지금부터 건기에 속하므로 항상 맑은 하늘만 이어졌는데,
이곳 고속도로에서 천둥 번개와 함께 귀한 빗방울이 떨어졌다.
휴게소에 들려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서
터키의 인절미처럼 생긴 과자와, 사고 싶었던 코란경전 독경한 CD를 샀다.
이스탄불로 향하는 버스속에서, 우리의 명강의 교수 이양의 터키 역사강의가
시작되었는데, 거의 듣지 못할 정도로 꾸벅꾸벅 잠이 쏟아졌다.
역시 공부는 어렵고 힘든 모양이다.
터키인은 자신들을 '투르키애'라고 부르는 것을 더욱 좋아하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자손'이란 뜻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 옛날 동쪽에서 부터 밀려온 유목민들이 (교과서에서는 돌궐족) 점점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곳 터키에 까지 와서 정착하였다 한다.
9세기에 셀축터키왕국을 세워수도를 콘약으로 정하고 12세기까지 번성하였으나,
분열하여 오스만 터키를 세웠고, 36대 슐탄까지 내려왔으나.
결국 1923년 독립된 터키공화국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한다.
세세한 설명을 하였지만, 지금은 거의 다 잊어 버렸다.ㅎㅎ
미국에서 보내온 트로이 목마.
도르르 구르고 싶은 평화로운 들판.
트로이 유적지에 핀 야생화.
지난 밤 잠자리가 바뀌어 오래동안 뒤척였다.
룸 메이트 언니는 곧 잠이 들어, 코고는 소리 요란하였는데
때로는 저러다 숨이 막히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로컬 가이드 이영애씨가 이스탄불은 위험한 곳이니 절대
혼자 아침 산책이나, 저녁 늦게 쇼핑 다니는 일은 하지 말라고
주의를 하였는데, 어떻게 내가 아침 산책을 빼먹겠는가?
디지털 카메라와 10$를 호주머니에 챙기고 6시에
호텔 안내서 한장을 들고 산책을 나섰다.
이스탄불은 터키 인구의 1/5, 1700만이 사는 제일 큰 도시이다.
수도는 앙카라로 옮겼으나, 긴 세월동안 수도였기에
지금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도시이다.
전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던 세계사속의
바로 그 도시이다.
골목의 도로는 로마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듯, 벽돌 모자이크였다.
이스탄불은 흑해, 마르마라해, 보스포르스해협, 골든혼.
바다로 둘려 쌓인 도시였다.
호텔을 나서자 바로 영화 '오리엔탈 특급열차'에 나왔던 그 역앞이다.
이른 아침이기에 상점은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고,
도로변에 신문을 나누고 배부 준비를 하는 사람만 보인다.
가이드가 위험하다고 하였기에, 될 수 있는 한 시선을 먼곳에 두고 걸었다.
그러나, 그곳의 사람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먼저 인사를 건네기에
나도 지난밤 배운대로 "구나이든!"하고 인사 하였더니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는다.
어제 저녁 조명을 받고 있던 그 첨탑을 찾아서 갔다.
비둘기떼만 가득하고 조용한 그곳에, 한 무슬림이 계단위 문앞에서
절을 하며 기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사원의 문이 열리지 않았을까?
그 사원 앞은 바로 강처럼 보이는 바다였다.
아직 청소전인지 사방이 지저분하다.
나중에야, 그곳이 바로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다리역활을
하는 여객선 터미널이라는 걸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배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낮에는 많은 인파로 넘쳐나는 그곳이, 새벽에는 갈매기만 나르는 곳이었다.
너무 호텔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다시 되돌아 걸어나와
도로를 건너 아까 그 사원(이레네사원)으로 돌아갔다.
사원 옆구리에는 수도꼭지가 주루룩 달려 있었는데,
한 청년이 커다란 생수통에 물을 받고 있었다.
이곳은 석회분이 많아, 생수를 마실 수 없다고 하였는데, 저 병의
물은 왜 받아가는 것일까?
가까이 다가가니 환하게 웃는데, 아주 미남 청년이었다.
나보고 이렇게 꼭지를 틀어라고 가르쳐 준다.
그곳에서 사원에 들어가기전 몸과 마음을 씻는 장소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거의 한시간 가까이 지났기에 호텔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이 안된다.
한국에서도 '길치'였기에 몇번씩이나 확인하고 걸었는데.....
역까지는 찾았는데 그다음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하는 수 없이 호텔 안내서를 길가는 차도르 차림여인에게 물었더니 모른다고 한다.
어쩌나. 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차를 탄 남자분이
차를 세우고 안내서를 보여 달라고 한다.
우리가 묶은 호텔은 아주 조그만 호텔이고, 그런 조그만 호텔이
역 주변에 수없이 많았다.
차속의 남자가 이쪽으로 쭉~가라고 가르쳐 준다.
조금 더 가서 뚱둥한 남자에게 물었더니,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가면서
길을 안내해 주었다.
무섭다고 한 터키 사람들이 이렇게 친절하다니!
나는 "싸올!" 인사를 건네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안 도로 바닥은 이렇게 모자이크 벽돌로 단단하게 만들어 졌다.
아침 햇살아래 서서히 깨어나는 성이레네 사원.
이 뽀죡 첨탑들이 바로 나를 터키로 이끌었던가?
건너편이 아시아라고 한다. 이른 시간이어서 조용하기만 한 여객선 터미널.
걸음을 되돌려 다시 찾아간 이레네 사원, 한쪽 첨탑은 보수 공사 중인 모양이다.
이곳에 앉아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모양이다.
이 청년이 나에게 보여준 환한 미소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사원,
막 출근준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모습.
6월 6일
첫날 우리가 묶은 바로 그 작은 호텔이었다.
이번의 방은 정면으로 이스탄불역과 마르마라 바다가 보이는 방이었다.
오늘이 이곳의 마지막 여행이고,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는 밤 12tl 비행기이므로
우리의 일정도 느슨하였다.
아침 9시까지 여유가 있었으나, 괜히 침대속에서 꾸물거렸다.
우리가 묶은 곳은 호텔(Hotel)이 아닌 오텔(Otel)이었기에
아마 호텔보다 규모가 작은 숙박소인 모양이다.( 내추측)
성소피아 사원은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6년간의 공사기간으로
537년에 완공한 웅장한 기독교 성당이었다.
537년이라면 우리나라 신라시대였을까?
지금으로 부터 1500년 전의 건축물이 어떻게?
고대 인간의 건축기술은 도대체 어느 수준이었을까?
밑에 받침대도 없는 높이55M의 돔형 천장.
둥근 원아래 1/2돔, 그 아래 또 1/4, 1/8로 나누어진 돔형식의 천장이
받들고 있었는데, 신의 힘을 빌려서 건축한 것이 아닐까?
(소피아란 뜻이 지혜라고 하였다)
너무나 완벽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짧은 공사기간에 지은 건물이엇기에 벽의 대리석의 색깔로
청색, 황색, 적색, 흰색 다채로운 색상으로 되어 있었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여 이슬람 사원으로 쓰였는데
다행히 모자이크 처리된 성화들을 파괴하지 않고 그 위에 시멘트를
발라 성화를 덮었기에, 우리는 그 화려한 모자이크 성화들을 볼 수 있엇다.
아타 투르크는 이 사원을 더 이상 사원으로 사용하지 않고
누구나 관람 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개조하였다.
아직 성화는 회색 시멘트를 제거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이곳 소피아 성당에서 다시 일행을 놓쳐 버리는 불행을 겪었다.
성당안 쇼핑센터에서 성화를 살려고 하였으나, 달러는 받지 않고
터키돈만 받느다고 하여 동전을 꺼내 사고 하는 바람에 일행들이 사라져 버렸다.
아까 동그란 구멍에 손을 대고 360도 회전하면서 몸을 움직이지 말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 진다고 하였는데, 그곳에 가서
나혼자 몸을 움직이지 않고 구멍을 엄지 손가락을 넣고 한바퀴 돌려 보았다.
국군 병원에 누워 있는 우리 아들 어서 낫게 해 주세요.하고.
사라진 사람들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갔는데 나는 그걸 모르고 아래층에서만 맴돌았으니....
하는 수 없이 밖에 나가니 그 푸른빛깔의 버스가 서 있는데
역시 운전기사뿐이 없었다.
바로 마즌편이 아흐메드(블루모스크)이엇으므로
저곳으로 갔느냐?고 손짓하여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여, 가 보았으나
역시 그곳에도 일행들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되돌아 오니, 아뿔싸~ 분명 조금 전, 서 있던 버스조차
행방이 묘연하였다.
우와좌왕하다가 경찰차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나는 내 가이드를 잃어 버렸고, 그에게 전화를 좀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막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는데, 반가운 버스가 나타났다.
교통 경찰이 그곳에 오래동안 차를 주차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한바퀴 슬슬 돌고 다시 돌아오는 모양이엇다.
그제야 우리 일행들도 나타났다.
붐비는 이집트 향신료 가게(그랜드 바자르) 앞에서
멀리서 바라본 성 소피아 사원
메모리가 없어 내부의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참 아쉬웠다.
광장에서 바라본 아흐메디사원.
이앞에서 난 구애를 받아, 붕~뜨는 기분을 느꼈다.
보스포르서헤협을 유람선을 타고 거슬러 올라갔다.
마르마라해에서 흑해까지 연결되는 해협인데, 흑해에서 내려오는
물살이 더 빠르다고 하였다.
일행을 다시 찾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더 이상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아야지 하고, 7광주 일행들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마치 강처럼 좁은 해안양옆의 주택과 별장들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중에서도 돌마바흐체 궁전은 압권이었다.
3번째 정박지 유럽에서 배를 내려 점심을 먹고,
다시 골든혼을 바라보며 구시가지로 돌아왔다.
성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사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오스만 제국이
17세기에 지은 아흐메디 사원.
내부가 온통 푸른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로 더 알려진 사원.
그 앞에서 난 예기치 않은 구애를 받았다.
블루 모스크 사원앞 조그만 기념품 가게에서 일하는 청년이
나에게 영어를 할 수 있느냐고 물어, 조금만 할 수 있다고 하였더니
나더러 참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하면서, 나에게 "달링~!"하고 구애를 하는게 아닌가?
전에 동유럽 체코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기에 난 붕~ 뜨는 느낌이었다.
다음에 한국 방문하겠으니,이 메일과 전화번호를 적어달라면서
메모지를 내 밀었다.
황홀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ㅎㅎ
(다음에 혹시 정말 전화가 오면 뭐라고 하지?
난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데.....)
성소피아 사원건너편 지하 물 저장소에 들어가 보고
비잔틴시대의 어마어마한 식수 저장소의 규모와 커다란 기둥들. 특히
메두사 머리가 조각된 기둥들도 오래 시간동안 유지되어 온 것이 신비스러웠다.
슐탄 35,6대가 살았다는 돌마바흐체궁전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첫날 보았던 톱카프 궁전은 보석, 장신구, 도자기 진열 중심이었다면,
이곳은 그림과 커텐, 양탄자, 가구의 화려함에 눈이 크게 열리는 곳이었다.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샹들리에와 순금으로 만든 목욕탕.
부패의 극치가 아니고는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 커튼의 레이스가 너무 예뻐 만져보고 싶을 정도엿다.ㅎㅎ)
마지막으로 들린 그랜드 바자르.
어느가게에 들어가도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그곳 상인들.
한국의 국력이 이렇게 커졌던가?
터키 나라에 와서 터키석 보석 하나 사지 못한 사람은 나밖에 더 있을까?
나도 목걸이를 만지작 거렸으나, 한국에 돌아가 괜히 가짜라는 소리
듣고 싶지 않고, 사실 장신구 좋아하지 않기에 그냥
기념 접시 두개만 사고 바자르를 나썼다.
이곳에서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의 큰 규모의 시장이었는데
저녁 7시가 되기 바쁘게 셔터를 내리는 것이 우리와 다르게 보였다.
이렇게 하여 나의터키 여행일정이 끝났다.
돌이켜 보니 참 짧은 일정이었는 것 같은데
막바지에 들어가자 난 집과 가족이 그리웠다.
잠오지 않는 밤에는 그냥 혼자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지막 날 밤, 룸 메이트 언니가 오래동난 잠꼬대를 하며
흐느껴 울기에 흔들어 깨우기까지 하였다.
돌아오는 비행기는 편서풍 영향으로 10시간도 채 비행하지 않고
인천에 도착하였다.
모두 그동안의 인연에 고마워 하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다시 김해공항까지 비행기를 기다려 타고,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남편은 회사일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부쩍 커버린 듯한 내 딸 아라를 부둥켜 안고
"아라야. 고마워! 사랑해!" 소리 질렸다.
역시 여행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기쁨을 누리기 위한 것인가 보다.
마르마라 해협 건너편은 유럽땅.
유람선에서 바라본 돌마바흐체궁전.
멀리 동서양을 이어주는 이스탄불의 다리. 현수교.
할례식을 앞두고 화려한 복장을 한 어린이들과 함께.
돌마바흐체궁전앞. 이궁전안은 촬영그지구역.
화려한 돌마바흐체 궁전입구.
신시가지 탁심광장 노상 카페앞에서. 종업원과 함께.
길거리의 과일장사.가판대앞에서 버찌를 들고 즐거워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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