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亥年 所願詩
이어령
벼랑 끝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벼랑 끝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덕담 대신 날개를 주소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까.
험난한 기아의 고개에서도
부모의 손을 뿌리친 적 없고
아무리 위험한 전란의 들판이라도
등에 업은 자식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앉아 있을 때 걷고
그들이 걸으면 우리는 뛰었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앞인데 그냥 추락할 수는 없습니다.
벼랑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다가 '북한이 핵을 만들어도 놀라지 않고
수출액이 3000억 달러를 넘어서도
웃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을 믿은 죄입니까.
남의 눈치 보다 길을 잘못 든 탓입니까.
정치의 기둥이 조금만 더 기울어도,
시장경제의 지붕에 구멍 하나만 더 나도,
법과 안보의 울타리보다 !
겁 없는 자들의 키가 한 치만 더 높아져도
그때는 천인단애(千斷崖)의 나락입니다.
비상(非常)은 비상(飛翔)이기도 합니다.
싸움밖에 모르는 정치인들에게는 비둘기의 날개를 주시고,
살기에 지친 서민에게는 독수리의 날개를 주십시오.
주눅 들린 기업인들에게는 갈매기의 비행을 가르쳐 주시고,
진흙 바닥의 지식인들에게는 구름보다 높이 나는
종달새의 날개를 보여 주소서.
날게 하소서. 뒤처진 자에게는 제비의 날개를,
설빔을 입지 못한 사람에게는 공작의 날개를,
홀로 사는 노인에게는 학과 같은 날개를 주소서.
그리고 남남처럼 되어 가는 가족에는
원앙새의 깃털을 내려 주소서.
이 사회가 갈등으로 더 이상 찢기기 전에
기러기처럼 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소리를 내어 서로 격려하고 선두의 자리를 바꾸어 가며 ! B>
대열을 이끌어 간다는 저 신비한 기러기처럼
우리 모두를 날게 하소서.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어느 소설의 마지막 대목처럼
지금 우리가 외치는 이 소원을 들어 주소서.
은빛 날개를 펴고 새해의 눈부신 하늘로
일제히 날아오르는 경쾌한 비상의 시작!
벼랑 끝에서 날게 하소서
===================================================
새해, 너를 맞는다 / 고은
? 고 은
가야 할 처음이 왔다 새해가 왔다
인내의 끝
예감의 시작으로
묵은 한라에 올라 너를 맞는다
숭고하거라
온 비겁
온 천박 토해버리고
단한번 숭고하거라
이 한반도 어디로 가느냐
목 없는 형천(刑天)에게
다 맡겨버리겠느냐
다 파헤쳐지겠느냐
다 꿀꺽 삼켜지고 말겠느냐
아니다 그간 쓰레기 널린 거리를 왔다
홑옷으로 우는 골목을 왔다
포효하는 열길 벼랑 파도 끝자락으로
저 죽어가는 개펄 달빛 쓰라린 신음으로 왔다
아니다
갈라져 주린 오장육부로 왔다
새해
너를 맞는다
흉금의 안쪽
지리 노고단 올라 너를 맞는다
장엄하거라
온 배척과 인색 내던지고 장엄하거라
그간 무엇을 하였더냐
무엇으로
숨찬 세상 한 모퉁이 여기를
마른 풀밭으로 남겼더냐
그런 것을 묻지 않거늘
이로부터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이리 내달려온 꿈 뚜렷이 있을진대
무엇으로 살겠느냐
컹컹 짖어 못 박아 묻는
새해 처음이 왔다
보라 막 솟아올라
뚝뚝 물 ?는 햇덩이 앞
내가 맨몸으로 멈춰서서
부르르 부르르 떨며
너를 맞는다
말 다음
뜻 다음으로
설악 소청에서 중청에서 대청에서
너를 맞는다
제발 덕분
지지리 못난 패거리 우둔 물리쳐 수려하거라
지금 설악 동쪽 푸른 바다
지금 저 서편 바다
고군산 밑 칠산바다 다 썩는다
오대 적멸보궁
치악 황장목
계룡 골짝
감악 안개 다 한 맺혀 천둥 밴다
이와 함께 한반도 각처의 넋들 망한다
밤 붉은 네온
붉은 십자
대낮 미친 형광 광고 아래
어느 넋도 얼도 기괴하지 않을 수 없다
온전할 수 없다
멍멍 멍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새해가 왔다
너를 맞는다
삼가 만년 장래에 피어날 백발 같은 존엄으로
백두 장군봉 올라 너를 맞는다
극히 신령하거라
지금 신령치 못하다면
언제까지나
너 노비이리라
너 거지이리라
너 도적이리라
너 고자 노릇 속여대리라
눈알 빠진 해골 웃음이더냐
그 허망한 히히 웃음이더냐
너의 말 그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으리라
새해가 왔다
이 한반도의 남과 북
오래 지친 꿈 속여서 너를 맞는다
확연한 바
다 내놓아야
어깨 겯고 찾아오리라
다 버려야
무릎 펴 채워지리니
새해가 왔다 새해가 와 너를 맞는다
온 누리 일곱 빛깔 활짝 펴
한 해 벽두 입 다물고
너를 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