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28. 목.
장 날
(노천명)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펀 글)
* * *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노천명 시인의 시 장날은
한국 근대의 추석 전 장날을 참 잘 표현한 시라고 생각된다.
내가 학창시절만 하여도 어머니는 추석상을 차리기 위해
쌀을 한 말씩이나 물에 담궈 쌀가루를 만들어 오셨다.
우리는 모두 대청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밤이 늦도록
송편을 빚었는데 어머니가 뜨거운 물로 익반죽을 한 커다란 함지박을
바라보면 언제 저 많은 것을 다 만들까? ....한숨을 쉬기도 하고
장독대와 변소를 들락거리며 꾀를 부리기도 하였다.
마당에 커다란 솥을 걸어놓고 우리가 빚은 생송편을 나란히 눕혀
어머니는 물이 끓는 솥위에 삼베를 두르고 솔잎을 깔아 쪄 내셨는데,
나는 먹지도 않는 송편을 왜 이렇게도 많이 만드느냐고 투덜거렸다.
어머니는 서울간 큰 오빠를 기다리는 듯 연방 눈이 대문으로 갔고,
잠이 매달린 내 눈에는 검은 빌로드 천같은 밤 하늘에
한 껏 부풀어 오늘 둥그런 달이 걸려 있었다.
먼 훗날 어머니가 안 계신 추석날, 가장 먹고 싶은 추석 음식은
바로 손으로 빚은 큼직한 송편이었는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송편의 표면에 얼깃설깃 그려진 삼베의 줄무늬와 향긋한 솔향기.
큼직한 송편안의 팥, 콩, 깨 등의 어머니 손맛이 그리워 울컥했다.
이제는 시장에 가면 다양한 모양과 색색의 송편이 있어 편하게
송편을 먹을 수 있지만 늘 어머니표 송편맛이 그리웠다.
어제 밤늦게 마산에 사는 아들과 며느리가 손자들을 데리고 왔다.
지난 설명절에는 오기로 한 날 아침, 갑자기 둘째 손자가 볼거리를 하여
입원하여 올 수 없었는데,
이번 추석에도 갑자기 손자가 아파서 못오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아들은 지난 추석에 차례를 지내면서, 다음 추석에는
우리도 정말 차를 놓고 예를 다하는 <차례>를 올리자고 간곡히 부탁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게 해 줘.
다음에 너희들이 제사를 모실때는 너희들 알아서 해라."고 하였는데,
나도 올해는 다리도 아프고 이곳저곳 몸이 좋지 않고, 게으름도 나서
그냥 성당에서 합동미사를 드리기로 하고 집에서는 다과만 올리기로 하였다.
추석 전날 아침부터 바쁘게 나물을 다듬고 생선을 찌고 전을 부치면,
집에는 음식냄새만 가득하고, 저녁에는 허리와 어깨가 아팠다.
추석날 아침은 상을 차려도 막상 절이 끝나면
아이들은 맛집을 찾아 밖으로 나가 버리고,
나 혼자 먹지 않는 음식을 갈무리하기에도 힘들었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라고 생각한다.
먹지도 않는 음식을 만든다고 허리가 아프게 일하기 보다는
가족들과 즐겁게 보내는 것이 명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에 오면 늦게까지 잠을 자는 아들도
오늘은 서둘러 일어나샤워를 하고 아이들 옷을 챙겨 입히고
며느리와 딸 모두 아침도 먹지 않고 나가 버렸다.
아침에 아들이 좋아하는 꽃게탕도 만들어 놓았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는 <런던 내셔널갤러리> 명화 예약을 하지 못해
현장 예매를 해야 하므로, 저녁에 먹겠다고 하면서 나가 버렸다.
오래만에 나들이 온 서울구경하기 바빠서
아마 오늘도 밤늦게야 돌아올 것이다.
아침도 안먹고 서둘러 나갈 때는 서운하였으나 마음을 비우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 흔들고 들어오니 한가로운 여유가 좋았다.
혼자서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고 손자들의 장난감 정리하고,
아이들이 벗어 놓은 옷들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면서
창가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나도 편안하고 한가롭다.
창으로 들어오는 가을 바람이 싱그럽고
안개가 살짝 낀 한강위의 윈드셔핑 하는 풍경이 한가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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