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방

마르셀 뒤샹 전시회를 보고

푸른비3 2019. 2. 16. 09:01

마르셀 뒤샹, <샘>, 1950(1917년 원작의 복제품), 필라델피아 미술관 125주년 소장품, 허버트 카메론 모리스의 (교환)기증, 1998 ⓒ Association Marcel Duchamp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전시정보<마르셀 뒤샹>, MMCA서울 1·2전시실, 2018.12.22 ~ 2019.04.07

“나에게 어려운 점은 지금 즉시 이 시대의 대중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내가 죽은 후 50년 혹은 100년 후의 대중을 기다리고 싶다.
이들이야말로 내 관심을 끄는 이들이다.”

- 마르셀 뒤샹

1917년, 뒤집어져 있는 변기를 미술관 전시장에 설치하고
작품이라고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현대미술의 아버지이자 20세기 혁신과
발상의 전환의 아이콘 마르셀 뒤샹!
사후 반세기가 지난 현재도 여전히 ‘동시대’인 작가,
과거에서부터 당신을 기다려온 그를 함께 만나보자.

현대미술의 거장 마르셀 뒤샹 사후 50주년을 기념한 최대 규모 회고전

20세기 개념미술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삶과 예술을 집중 조명하는 <마르셀 뒤샹> 전이 12월 22일부터 2019년 4월 7일까지 MMCA서울에서 개최된다.

마르셀 뒤샹은 프랑스와 미국을 포함한 국제 미술무대에서 활동하던 아티스트로, 오늘날까지 현대미술의 신화처럼 존재하는 예술가이다. 그는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전위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작가로 ‘레디메이드’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예술작품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현대미술의 예측 불가능한 다양성을 예고했고, 미술의 창조와 해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뒤샹의 사후 50주년 되는 해를 맞아 열리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마르셀 뒤샹> 그랜드 오픈 전, 뒤샹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함께 탐구해보자.

마르셀 뒤샹, 그리고 그가 현대미술에 남기고 간 유산

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 1912,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 소장품, 1950
ⓒ Association Marcel Duchamp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 1912,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 소장품, 1950
ⓒ Association Marcel Duchamp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뒤샹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공무원 집안에서 육 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 안에는 화가였던 외할아버지 ‘에밀 프레데릭 니콜’의 그림으로 가득했다고 회상하며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 것도 그 영향이라고 말했다. 뒤샹은 부유했던 부모님 덕에 지역 최고 명문 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독립하여 파리의 신문과 잡지에 만화를 투고해 생계를 꾸리는 화가 그룹에 합류하여 드로잉 기량을 익혔다. 만화가 돈을 벌게 해주진 않았지만 그에게 소속감을 주는 존재였다.

이후 1908년 외할아버지의 회고전에서 화가로서 공식 데뷔전을 치르고 모던 미술계와 교류한다. 모던 미술계의 모더니스트들은 ‘현 상태를 거부하고 자유와 포용성이라는 새로운 기조에 충실하겠다’는 것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는데 뒤샹 역시 마찬가지였다. 1910년 입체파 일원이 된 뒤샹은 신체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자신만의 *입체주의를 시도한다. 이 노력의 산물이 바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다. 여기에 등장하는 꼭두각시 같은 형상은 반복되는 선형적 요소로 분해되는데, 이 선은 인물의 움직임을 그림으로 기록한 추상적 표현이다.
*입체주의: 형태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사물을 여러 시점(다시점)과 입체적으로 표현한 미술

이 작품은 1913년 국제현대미술전에서 스캔들을 일으킨 회화 작품으로, 대부분의 예술 평론가들은 작품의 구성을 이해하기 어렵고 농담 같은 풍자화라 평했다. 관능적인 누드 초상의 전통을 기계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입체파의 균열된 형태, 사진과 영화의 스톱모션 등 자연의 시공간에 대한 지배적 관념을 뒤엎는 현대 과학과 철학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문화의 현상 유지를 거부하는 상징으로 떠올랐고,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이렇듯 뒤샹은 미국 미술계의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예술가로서 다른 방식의 길을 찾아보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25세의 나이에 회화와 결별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며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 일명 <큰 유리>를 1912년부터 8년에 걸쳐 제작하기 이른다. 동시에 평범한 기성품을 예술적 맥락에 배치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레디메이드’(이미 만들어졌다는 뜻)라는 개념을 만들어 예술에 관한 정의를 완전히 뒤집었다. 이 개념은 예술가가 확실한 의도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물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물건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상점 진열장에서 매일 발견할 수 있는 화장실 변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직접 자기 손으로 만들었냐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평범한 일상용품을 선택하여 전시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한 것이다. -마르셀 뒤샹

레디메이드를 창안해낸 뒤샹은 1917년 소변기 <샘>을 ‘R. Mutt’란 가명으로 전시회에 출품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혐오스러워한 전시 관계자들에게 거부당했고, 소변기는 전시가 끝날 때까지 전시관 구석에 방치되었다. 그러나 훗날 많은 후배 화가들이 그의 작품에 매료되면서 뒤샹은 현대미술의 개척자로 불리게 되었다.

나에게는 항상 나를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마르셀 뒤샹

만 레이, <에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 1921,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품, 알렉시나 뒤샹의 자녀 자클린, 폴, 피터 마티스 기증
ⓒ MAN RAY TRUST/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 Association Marcel Duchamp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만 레이, <에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 1921,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품, 알렉시나 뒤샹의 자녀 자클린, 폴, 피터 마티스 기증
ⓒ MAN RAY TRUST/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 Association Marcel Duchamp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또한 1920~30년대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연기하기 위해 ‘에로즈 셀라비’라는 또 다른 여성의 자아로 자신을 위장하며 신비로운 아우라를 유지했다. ‘에로즈 셀라비’로서의 시각적 이미지는 사진작가인 만 레이가 화장품, 보석 장신구, 모피 목도리와 다양한 모자를 쓰고 여장한 뒤샹의 자화상을 촬영하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뒤샹은 남성과 여성을 넘어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제3의 성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선보이며 사회적인 틀을 깨기도 했다.

놀랍게도 뒤샹은 20대에 이 모든 것을 이룩했으며 그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의 작품들은 복잡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지금까지도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큼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20세기 현대미술이 나아가고 있는 궤적의 가장 뚜렷한 첫 발자국을 남긴 예술가.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미적 표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창안하며 더 큰 세상으로의 문을 열어준 그의 이야기가 곧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시작된다.


(펀글)

   


       *     *       *       *


마르셀 뒤샹 전시회

국립현대 미술관 서울관

2018,12,22~2019, 4, 7


현대미술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마르셀 뒤샹 전시를 서울에서 한다고 하였다.

내 학창시절 미술 교과서에도 실렸던 그의  <샘>을 드디어 한국에서 볼 기회였다.

지난 1월 초순 쌀쌀한 날씨속이지만 두터운 외투와 목도리로 칭칭 감고 찾아갔다.

입구의 락커가 빈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람인들이 미술관을 찾아왔다.


겨울이지만 미술관 안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쾌적한 공간이다.

결국 외투를 넣을 둘 공간을 찾지 못하고 팔에 걸치고 전시장안으로 들어 갔다.

다른 전시관과는 달리 이 전시관은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대신 마음에 깊이 남기고 싶어 조금 더 천천히 관찰을 하는 마음으로 감상하였다.


1887년 프랑스의 북부 노르망디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화가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미술의 분위기속에서 성장하였으며, 1908년 외할아버지의 회고전에서

공식 데뷔전을 치루고 모던 미술계와 교류를 하였으며 모던 아티스트와 활동을 하였다.

1910년 입체파 일원이 된  그는 신체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묘사 자신만의 입체주의를 시도하였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선보인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2의 작품을 보고 있으니 정말

살과 근육이 있는 인간의 나상이 살아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917년에 전시장에 출품한 <샘>은 화장실의 변기를 뒤집어 마치 분수가 치솟아 오르는

느낌을 주는 작품은 관점에 따라 모든 것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을 하게 하였다.


기대하였던 <샘>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풋~!"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모든 예술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며, 하늘이 내린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를 기피하는 변기를 맑은 물이 퐁퐁 솟아 오르는 샘이라고 생각하였을까?

그는 자신을 동시대의 사람들과 소통하기보다 사후 50년이나 100년 후의 사람의 관심을 끌고 싶다고 하였다.


2018년은 그가 죽은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그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전시회를 기획하였을 텐데, 아무래도 내게는 아직 그를 충분히 이해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

특히 그는 1920년~30년대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연기하기 위하여 '에로즈 셀라비'라는 이름으로

여성으로 위장하여 신비로운 아우라를 연출하였다는데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그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몇 개의 전시실로 나뉘서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일명 <큰 유리>등 빛과 공간을 활용한 전시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모두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였다.

예술가는 시대를 앞서가고, 평범한 범인인 나는 그 예술가의 눈높이를 따라 가지 못하고 허둥된다.

그래도 이런 전시를 기획한 한국의 현대 미술관이 있어서 살짝 맛이라도 보게 해 줌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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