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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푸른비3 2009. 1. 30. 10:15

인물

허난설헌 (허초희)
출생
1563년
사망
1589년 3월 19일
출신지
강원도 강릉
직업
시조시인
경력
1585년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몽유기'를 지음
1576년 김성립과 결혼
대표작
유선시, 빈녀음, 곡자, 원부사, 봉선화가
위키백과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1589년)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본명은 초희(楚姬)[1]로 호는 난설헌(蘭雪軒)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1563년 명종 18년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인... 더보기

春雨暗西池 (춘우암서지) 輕寒襲羅幕 (경한습라막)

 

愁依小屛風 (수의소병풍) 墻頭杏花落 (장두행화락)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찬 바람이 장막 속에 스며들 제

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으로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 호는 난설헌. 

허엽의 딸이고, 허균의 누나이다. 집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집안과 교분이있던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웠다. 8세에 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 불렸고, 15세에 김성립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결혼생활을 못했다. 남편은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기방을 드나들며풍류를 즐겼고, 시어머니는 그녀를 학대했다. 게다가 어린 남매를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하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로 요절했다.

시 213수가 전하는데, 그 중 신선시가 절반이 넘는 128수이다. 동생 허균이 뒤에 명나라 시인에게 그녀의 시를 보여주어 중국에서 유고집 <난설헌집>이 발간되었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한문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들은 국문이 창제되면서부터 한문 대신에 국문을 익혀 겨우 언해서(諺解書)를 읽거나 편지를 쓰고 제문을 짓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비록 사대부 부녀자라도 한문을 정식으로 익힐 수 없었기 때문에 간신히 배웠다 하더라도 남성들과 동등한 솜씨를 발휘하여 품격 높은 시나 문장을 지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여류 한문학은 정통의 범주가 아닌 소위 방외인문학(方外人文學)에 포함되는 예외적인 문학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조선 중엽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기녀들이나 사대부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시조나 한시를 짓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난설헌은 본격적인 문학을 하는 수준에 도달했으며, 사후에는 자신의 문집이 동생 허균의 손으로 출간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난설헌이 가진 문학적인 자질은 허문(許門, 허씨네 집안)에서 싹트고 닦아졌지만, 남성 문인들처럼 열려진 공간에서 발휘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작품을 가다듬고 만들어낸 공간은 다름아닌 규방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 살 위인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다.

그녀가 정확히 몇 살 때 결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4, 15세 무렵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성립의 집안 사람들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으나, 막상 그는 능력이 변변치 못했던 듯하다. 그는 난설헌이 27세로 죽은해에야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도 정8품인 홍문관 저작(著作)에 머물렀다.

그러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난설헌은 평범한 가정주부의 역할을 감당해내지 못했던 듯하다.

우선 남편과의 금술이 좋지 못하였다. 혀균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누이에 대해, "살아 있을 때에는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더니, 죽어서도 제사를 받들어 모실 아들도 하나 없구나"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결혼생활 초부터 남편이 글 공부에만 매달려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게다가 벼슬이 없던 남편은 똑똑한 부인을 외면하였다.

 

무엇보다도 난설헌은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가장 고달펐다.

그녀가 바느질이나 살림보다 독서와 글짓기를 좋아했으니 이런 며느리를 곱게 봐줄 리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가(媤家)에서의 고통과 불화는 어쩌면 그녀의 성격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그것은 허씨 가문의 사람들이 대체로 남들과의 관계에서 조화롭게 지내지 못했다는 지적 때문이다. 허엽, 허성, 허봉등은 직언은 잘 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적이 많았고, 허균도 경솔하고 경박하다는 평을 받았다.

 

허난설헌의 가슴에 맺힌 한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이 넓은 세상에 하필 조선에 태어났는가, 또 하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마지막으로 왜 수많은 남자 가운데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는 여자에게만 강요되는 심한 굴레를 이렇듯 한탄하였다. 어쨋든 그녀에게 결혼생활은 속박과 장애일 뿐이었다.

 

숨을 거두기에 앞서 그녀는 생명을 불태우듯이 써왔던 시고를 전부 태워버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유언대로 그녀가 죽자 그 주옥 같은 시들은 모두 불 태워졌다. 물론 시댁 사람들이 한 일이지만, 통탄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녀가 친정에 남겼던 시고가 그녀의 동생인 허균에 의해서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부적인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은 그녀였지만, 그녀가 세상을 뜨고 열 일곱 해가 지난 1606년, 그녀는 우연히 일약 국제적인 존재가 되었다.

때마침 그 해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주지번과 부사 양유연이 시작을 좋아하여 허균과 친교를 맺고 있었는데 어느날 두 사람은 허균이 보여준 죽은 그녀의 유고를 보고 그 훌륭한 시에 경탄하였다.

 

주지번은 허균에게 부탁하여 허균이 준 허난설헌의 시고를 명나라에 가져가 조선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집]을 발간하였고 그 시집은 명나라 도처에서 크게 환영 받아 각지에서 시집의 주문이 쇄도하여 문자 그대로 낙양의 종이값을 올렸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녀의 시집이 대단한 평판을 받자 곧 조선에 역수입 되었지만 허균이 1818년 반역죄로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녀의 시집도 그대로 매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1692년이 되어서야 다시 조선에서 그녀의 시집이 출판되었다. 그것은 명나라에서 출판된 것과 같은 것이였다.

 

게다가 그녀의 작품은 서울에서 출판된 것이 아니라 동래(부산)에서 간행되었다.

무역차 부산을 왕래하던 일본의 사신과 상인들도 이 시집을 일본에 가지고가서 분디이야 지로베에 등에 의하여 간행되어 일본에서도 널리 애독되었다. 이렇게 국제적인 각광을 받은 그녀의 시는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문학사에 빛나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녀의 시고가 대부분 불타 버린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감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걸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여류시인에 대해 좋은 인식은 가지고 있지 못한것 같다.

그래도 중국에 그녀의 작품이 남아있어 오늘날 우리가 그녀의 훌륭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작은 병풍에 기대어 선 채로 봄비에 떨어지는 살구꽃을 바라보는 허난설헌의 모습에서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자신의 젊음을 한탄하는 애잔하고 고독한 정서에 마음이 아프다. 그녀는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여인이였다. 

[출처] 봄비 허난설헌 |작성자 수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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