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시인 시편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아우슈비츠 3
- 神의 어린양
그대들
긴긴 겨울밤 무사했다면
아이들도 남편도 무사했다면
꿈에선들 그대들은 보았으리라
칼끝 같은 어둠 멀리 들판 끝에서
온갖 살붙이 모닥불에 바치며
야경의 모닥불에 넋을 사루며
그대들 안녕을 근심하는 예수
그대들 후손들을 염려하는 예수
생시엔들 그대들은 알았을까 몰라
아직 그대들 남은 삶 넉넉해서
울창한 미래 헤아리는 아침이면
흔들리는 한반도 기둥 뿌리 부여잡고
줄을 서서 제물로 사라지는 자,
오호라 통재라
그의 두 발은 차꼬를 매고
그의 두 손은 철사줄에 묶인 채
그대들 버린 말(言)로 재갈 물려
그대들 팔매질에 피 흘려
<고정희,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오매, 미친년 오네
―프라하의 봄·8
오매, 미친년 오네
넋나간 오월 미친년 오네
쓸쓸한 쓸쓸한 미친년 오네
산발한 미친년 오네
젖가슴 도려낸 미친년 오네
눈물 핏물 뒤집어쓴 미친년 오네
옷고름 뜯겨진 미친년
사방에서 돌맞은 미친년
돌맞아 팔다리 까진 미친년
쓸개 콩팥 빼놓은 미친년 오네
오오 오월 미친년 오네
히, 히, 하느님께 삿대질하며
하늘의 동맥에다 칼을 꽂는 미친년
내일을 믿지 않는 미친년 오네
까맣게 새까맣게 잊혀진 미친년
이미 사망신고 마친 미친년
두 눈에 쌍불 켠 미친년 오네
철철철 피 흐르는 미친년
아무것도 무섭잖은 맨발의 미친년
아무것도 걸리잖는 미친년 오네
<누가 당하나>
사지에 미친 기운 불끈불끈 솟아
한 손에 횃불 들고
한 손에 조선낫 들고
수천 마리 유령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허접쓰레기들 훠이훠이 불사르러
허수아비 잡풀들 싹둑싹둑 자르러
오 무서운 미친년
위험스런 미친년 달려 오네
(여엉자야, 수운자야…… 미친년 온다
문단속 해라…… 이럴 땐 ××이 제일이니라)
『눈물꽃』, 1986, 75―76
손이 여덟 개인 신의 아내와 나눈 대화
―외경읽기
어느 먼 나라 힌두교 대사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손이 여덟 개인 신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문득,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우리 나라 어머니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지나가는 말로 수작을 걸었습니다
여덟 손을 가진 신의 아내여
빛나는 신들의 시대,
백포도주로 강을 넘치게 하고
떠오르는 보름달을 그 위에 멈추게 하던 신의 시대에서도
여자는 일하는 어머니였습니까 아니면
임신과 출산의 기계였습니까
신들은 이마에 땀을 내지 않지만
백성의 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답니다
내 남편 위시누는 머리가 넷이지요
동서남북 백성을 점지하기 때문이고
내 팔이 여덟임은
사면팔방 백성들의 마음을 보살피기 때문이랍니다
생기복덕 발원하는 백성들을
훈육하고 다스리고 먹이고 잠재우고
축복하고 일으키고 싸매주고 위로하는 일이란
신의 아내가 담당하는 것이지요
남편 위시누는 통치를 주관하고
나는 그 내조를 책임졌답니다
아하, 공―사 역할 분리가 당신 시대 것이군요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십니까?
파리나 날리고 있답니다
세속의 남자들이 대권에 골몰하고
그 여자들이 내조에 서원하니
우리는 속세에서 버림받았답니다
신들은 사원에 갇힌 신세랍니다
신이 버림받은 시대
인간 승리 시대를 어떻게 보십니까?
오고 있는 역사는 언제나 개벽세상이고
와 있는 역사는 언제나 남자세상이었으니
이제 평등하지 않은 것은 종래 버림받겠지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1992, 108-110
지상의 양식
늦어서, 느져서 죄송합니다
안경알을 반짝이며 그가 들어섰을 때
서울시 주민등록증을 가진 그에게서
나는 딱 호랑이 냄새를 맡았다
죽은 것과 썩은 것
먹지 않는 호랑이
단식의 고통으로 빛을 뿜는 호랑이,
눈을 휘둥그레 떠보니
그는 기산지절 별건곤 암호랑이였다
호랑이의 새끼를 밴 호랑이였다
온갖 오염 눈부신 서울에서
온갖 잡새 지저귀는 반도에서
공해 없는 털가죽과 흰
발톱이라니,
붕새의 웅비라니……
맹물 두 잔에 마른 번개가 쳤다
정·전·이·라·며
물잔 옆에 촛불이 너풀거렸다
학교로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오던 문으로 그가 다시 나갈 때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는
온순한 사람들의 등을 보였다
그가 앉았다 일어선 자리에서
오월의 초저녁 바람이 불었다
나는 심장에 플러그를 꽂았다
『아름다운 사람 하나』, 1990, 40―41
매맞는 하느님
―여성사연구 4
깡마른 여자가 처마 밑에서
술취한 사내에게 매를 맞고 있다
머리채를 끌리고 옷을 찢기면서
회오리바람처럼 나동그라지면서
음모의 진구렁에 붙박혀
증오의 최루탄을 갈비뼈에 맞고 있다
속수무책의 달빛과 마주하여
짐승처럼 노예처럼 곤봉을 맞고 있다
여자 속에 든 어머니가 매를 맞는다
여자 속에 든 아버지가 매를 맞고 쓰러진다
여자 속에 든 형제자매지간이 매 맞고 쓰러지며 피를 흘린다
여자 속에 든 할머니가 매 맞고 쓰러지고
피 흘리며 비수를 꽂는다
여자 속에 든 하느님이
매 맞고 쓰러지고 피 흘리며 비수를 꽂고 윽 하고 죽는다
여자 속에 든 한 나라의 뿌리가
매 맞고 피흘리고 비수를 꽂으며 윽 하고 죽는다
깊은 밤 사내는 폭력의 이불 밑에 잠들고
세상도 따라들어가 잠들고
오뉴월 한서린 여자의 넋 속에서
분노의 바이러스가 꽃처럼 피어나
무지개 빛깔로
이 지상의 모든 평화를 잠그고 있다
아아 하늘의 씨를 말리고 있다
『여성해방의 문학』, 또 하나의 문화 제3호, 1987, 61―62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외경읽기
어린 딸들이 받아쓰는 훈육 노트에는
여자가 되어라
여자가 되어라…… 씌어 있다
어린 딸들이 여자가 되기 위해
손발에 돋은 날개를 자르는 동안
여자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발톱이 된다
일하는 여자들이 받아쓰는 교양강좌 노트에는
직장의 꽃이 되어라
일터의 꽃이 되어라 …… 씌어 있다
일터의 여자들이 꽃이 되기 위해
손톱을 자르고 리본을 꽂고
얼굴에 지분을 바르는 동안
꽃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이빨이 된다
신부들이 받아쓰는 주부교실 가훈에는
사랑의 여신이 되어라
일부종신의 여신이 되어라 …… 씌어 있다
신부들이 사랑의 여신이 되기 위해
콩나물을 다듬고 새우튀김을 만들고 저잣거리를 헤매는 동안
사랑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기상이 된다
철학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권력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종교가 여자를 불러 사자로 둔갑한다
그리하여 여자가 되는 것은
한 마리 살진 사자와 사는 일이다?
여자가 되는 것은
두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 옆에 잠들고
여자가 되는 것은
세 마리 네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새끼를 낳는 일이다?
그러니 여자여
그대 여자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사자의 발톱은 평화?
사자의 이빨은 고요?
사자의 기상은 열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1992, 134-36
무엇이 그대와 나를 갈라 놓았는가
비정하게 저무는 낯선 거리에서
그대는 저쪽으로 나는 이쪽으로
운명을 수락하듯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향해 갑니다
당신을 사랑해, 라고 말하고 싶을 때조차
왜 우리는 단순하게 손잡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질투하는 두 짐승처럼
함께 가는 길에 퉤퉤 소금을 뿌리는 것일까요
때로 나는 내 자신 속에서
그대와 나를 갈라놓은 내 적을 발견합니다
너는 검은색이고 나는 흰색이야
당신을 향하여 금을 긋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의 적을 봅니다
시 한편 없이도 살만 찌는 주제에
하하 인생의 깊이와 넓이?
당신을 향하여 거드름을 떠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의 적을 봅니다
여보세요, 사랑장사를 말로만 하시나요 외로움 같은 거 아시기는 아시나요 마음 좀 어루만질 시간은 있으세요 구닥다리 소외감 알아보시겠어요 빈 의자 하나쯤 건사는 하시나요
당신의 사랑법에 찬물을 끼얹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의 적을 봅니다.
아암 째째한 인생은 당당하므로 나는 하품하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지루하고 지루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게으르고 인색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삭막하고 황량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단물이 다 빠진 여자를 좋아합니다 나는 머리 속에 오직 남자밖에 든 게 없는 여자를 좋아합니다(좋아하려고 목하 노력합니다)
당신의 행복론에 돌을 던지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의 적을 봅니다
그토록 자부하는 풍요의 식탁에는 여자민중이란 메뉴도 있나요? 해방의 만찬이란 식단도 있나요? 통일 민주 염원이란 조찬도 있나요? 장백산 횡단이란 특식도 있나요? 보수대연합분쇄라는 주문식단도 있나요?(있으면 어디가 덧나나요?)
당신의 인생론에 칼을 들이대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의 적을 봅니다
그러나 때로 나는 당신 속에서
그대와 나를 갈라놓은 당신의 적을 만납니다
당신과 다정하게 마주앉지만
내 품속에서 슬몃 얼음이 만져질 때
해를 거듭하며 만나고 또 만나도
당신에 대하여 아는 게 없을 때
아무리 코를 킁킁거려도 들풀 냄새가 안날 때
나는 당신에게서 당신의 적을 만납니다
나는 사랑받는 여자예요, 얼굴에 써붙이고 다니는 사이
앉자마자 나 바빠, 허둥대는 사이
나는 현모양처예요, 십분 간격으로 집에 전화하는 사이
나는 수퍼우먼이야요, 잠시도 시선이 안정되지 않는 사이
여자의 본분은 희생봉사 아니예요, 중간에서 남의 말 뚝뚝 자르는 사이
나는 당신에게서 당신의 적을 만납니다
요즘 왜들 불그죽죽 물드는지 모르겠어요
과격한 행동은 곤란하잖아요
민중여성 어쩌고보다 기층여성,
생존권투쟁 어쩌고보다 소외계층 생계 대책, 하면 부드럽잖아요
광주항쟁보다는 광주사태, 하면 거부감이 덜하잖아요
시국혼란 오면 무사할 수 있어요?
십리 밖에서부터 정실당리당략 울타리를 치는 동안
나는 당신에게서 당신의 적을 발견합니다
아아 그러나 때때로
나는 당신 속에서 동지를 만납니다
좌절의 밭고랑에 토악질하는 등 두드리는 손끝에서
나는 동지의 순정을 만납니다
야금야금 시시하고 데데해진 사람끼리
어둔 밤길 동행하는 든든함 속에서
나는 동지의 따뜻함을 만납니다
슬픔의 한자락 붙드는 모습에서
간간이 주눅드는 인간 냄새에서
두 눈에 가득 고이는 상처에서
나는 동지의 그리움을 만납니다
이 땅이 뉘 땅인데……외치는 함성에서
혜영이를 살려내라……탁아입법 운동에서
공해 없는 금수강산……살림운동 행진에서
핵무기 결사반대……빛 안나는 싸움에서
성폭력 파쇼 척결……당당한 시위에서
참교육 평등사회……학부모 단결에서
민주방송 힘내세요……이어지는 격려에서
나는 동지의 믿음을 만납니다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가 걸어갔고
우리 이모와 고모가 걸어갔고
오늘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내일은 우리 딸들이 가야 할 이 길,
이 길에 울연한 그대 모습 마주하여
우리 서로 한 순간의 포옹 속에서
억압 끝, 해방무한 동지를 만납니다
"여자가 하나 되는 세상을 위하여―이야기 여성사·6"
『주부, 그 막힘과 트임』, 또 하나의 문화 제6호, 1990, 236―40
동 행
스산한 불빛들로 가득한
가리봉동의 밤거리를 걸으며
동행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음산한 어둠으로 가득한
구로동의 골목길을 더듬으며
저무는 우리 삶 어깨동무해 주는
동행의 기쁜 날 생각했습니다
가리봉동에 엎드려 웃는 여자들이
지폐를 헤아리는 남자들의 발 아래서
여름날 수풀처럼 무성했다가
가을날 단풍처럼 무르익었다가
겨울날 눈발처럼 휘날렸다가
진구렁 가랑잎 되어 뒹구는 길 돌아오며
동행하는 무서움 생각했습니다
유방에 불을 켠 여자들이
동해안처럼 줄선 남자들의 발 아래서
실크로드의 황혼이 되었다가
허구한 날 강태공의 월척이 되었다가
홍등가 이무기의 횟감이 되었다가
더는 내려갈 수 없는 곳, 거문도
거문도로 내려가는 길 돌아오며
동행하는 분노를 생각했습니다
오 거문도 해안에서 우는 여자들이
한반도의 썩은 물로 철썩이다가
한반도의 쓰레기로 솟구치다가
그러나, 그러나
세상의 더러움 다 걸러내고
푸른 해일 일으키며 달려오는 곳에서
깊은 바다 이끌며 돌아오는 포구에서
동행의 벅찬 힘 생각했습니다
동행의 소중함 생각했습니다
『하나보다 더 좋은 백의 얼굴이어라』, 1988, 138―39
온누리 봄을 위해 부르는 노래
―지리산의 봄 7
남녘 태백산맥에서 발원하는 봄기운과
북녘 백두산맥에서 뻗어내린 봄기운이
내려오다 올라가다 얼싸안는 곳에서
어여쁘구나 지리산이여
대명천지 어머니들 일어나
장엄한 젖줄을 쓸쓸한 땅에 물리니
그 한줄기는 소백산맥으로 받아내고 그 한줄기는 노령산맥으로 받아내고 그 한줄기는 백악산맥으로 받아내고 그 한줄기는 차령산맥으로 받아내고 그 한줄기는 광주산맥으로 받아내는 곳에서
눈부시구나 지리산이여
별건곤 어머니들 일어나
둥글디둥근 수평선을 이루며
수려한 치마폭을 황량한 땅에 덮으니
호남평야 일으키러 영산강 달려가고 김제평야 일으키러 낙동강 달려가고 경기평야 일으키러 임진강 달려가고 김해평야 일으키러 섬진강 달려가고 내포평야 일으키러 금강 달려가고 나주평야 일으키러 보성강 달려가는 곳에서
영원하구나 지리산이여
시방세계 울창한 어머니들 일어나
봄기운 휘몰아 산천초목 흔드니
그 바람 압록과 청천에 이르고 그 바람 대동과 두만에 이르고 그 바람 금강 일만이천봉에 이르고 그 바람 묘향산과 구월산에 이르고 그 바람 북만주땅 요동벌에 이르고 그 바람 북방을 휩쓰는 곳에서
우뚝우뚝하구나 지리산이여
『지리산의 봄』, 1987, 49―50
우리 깊고 아득한 강을 이루자
―천구백팔십육년 가을의 일기
우리 강을 이루자
깊고 아득한 강을 이루자
북한산 하늘이 절하러 내려오고
첫 동트는 새벽이 이마를 담그는
맑고 큰 강을 이루자
저 빈 거리에서 홀로 깊어지는 강,
너나없이 눈을 씻고 귀를 씻기도 하는
초록빛 융융한 강을 이루자
해동의 슬픔이 깊은 강물 이루는 날
바람이 달려와 옥문을 열어젖히리
돌들이 일어나 해방노래 부르리
광화문통 사람들이여
퇴계로와 율곡로 사람들이여 오
수유리 사람들이여
우리 일어나 강물로 흐르자
굳게 닫아지른 빗장을 활짝활짝 열어젖히고
순금 족쇄와 쇠사슬을 풀어버리고
더운 목숨 저 깊은 곳
다만 도도한 강물로 흐르자
서대문에서 남대문까지
남대문에서 동대문까지
동대문에서 북문로까지
최루탄과 총칼을 잠재우는 강,
마포진에서 강남진까지
강남진에서 강동진까지
강동진에서 강북진까지
온갖 쓰레기들 쓸어가는 강,
넓고 찬란한 강을 이루자
그 강물에 돛 올리는 일천의 거룻배
고향으로 달려가 자유 하늘 만나려나
그 강물에 띄우는 일만의 봉화불
서천서역국에서 민주세상 비추려나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강물은
바로 어머니의 핏줄 속에 있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람은
바로 우리 가슴 속에 있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여
탄생에서 죽음까지 그리운 사람이여
우리 황홀한 강을 이루자
수억만리 타관까지 흐르고 흘러
다시 하나로 돌아오는 강,
오천만이 엎드려 혼을 씻기도 하는
대천세계 가이없는 강을 이루자
최초의 최대의 부활을 이루자
『지리산의 봄』, 1987, 95―97
연가(戀歌)
아픈 머리에 열이 가라앉고
창마다 환하게 불빛 고이는 저녁
겨울 난롯불에 내 혼을 쬐며 고린도전서 13장을 펴면
내 진실의 계단 어디쯤서 너는 오고 있는가
어둠을 쓰러뜨리며 난롯불은 조금씩 내 피를 뎁히고
꿈틀이며 꿈틀이며 타고 있는 글자들
구름이 가는 곳을 묻고 싶은 황혼쯤
엉겅퀴 울타리를 밟고 가는 바람처럼
내 안에 서걱이는 한 무더기 공허
한 무더기 공허로도 비칠 수 없는 얼굴
불심지 휘감아도 살속 캄캄한 어둠 목구멍을 채우네
지구 가득 부신 햇빛 부려놓고
노을을 물들이는 태양이여,
산마루 넘어가는 태양이여,
눈은 눈으로 구름은 구름으로 떠나고 있을 때
나무들 우쭐대는 진종일 바람은 바람으로 만나고 있을 때
내 깊은 눈물샘 어디쯤서 물그르매
물그르매 번쩍이는 너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그림자 멀리 멀리
얼음짱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듯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듯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듯함이
물과 기름으로 와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듯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듯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와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 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 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듯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듯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고정희
198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의 여성운동, 민족문학의 현장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활동가로, 시인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고정희. 그녀의 이르고, 돌연한 죽음이 충격이긴 했지만 그녀가 남긴 말들의 흔적은 이렇게 또렷이 살아 있다.
시인 고정희는 1948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현대시학>에 시 <부활 그 이후>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83 시집 <이 시대의 아벨>발간하였고,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다. 생전에 그녀는 여성운동에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 홍보 책임간사. 여성신문 주간 등을 역임하였고,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 중 사고로 사망했다. 주요 시집으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이 시대의 아벨>, <초혼제>, <눈물꽃>,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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