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빈치 코드'속의 한 장면.
영화 '다빈치 코드'가 요즘 크게 영화팬의 시선을 끌고 있다고 하였다.
난 영화가 나오기 전 아들의 권유로 '댄 브라운'이 쓴 소설을 읽었었다.
천주고 신자인 나의 시각에서 본 이 소설은 그냥 한 작가의 픽션으로
이런 작품도 만들어 낼 수 있겠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영화화 되어 나오고 요즘 그와 유사한 소설
스페인의 젊은 작가 '하비에르 시에라'의 '최후의 만찬'을 읽으면서 내 마음에 많은
혼란과 갈등이 오는 것이 사실이다.
처음 '다빈치 코드'를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인간의 감성을 다룬 소설만 주로 읽어 오던
나에게는, 다중적인 의미와 암시가 들어 있었기에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소설이라고 여겨졌다.
메모도 하지 않고 읽었기에 외국의 복잡한 긴 이름도 머리속에 잘 입력이 되지않아
'사일러스' '아링 가로사' '자크 소니에르'가 누가 누구인지도 헷갈린 정도엿다.
다 읽고 나서 아들이 재미있었느냐고 묻기에 난 솔직히 어려워서 무얼 읽엇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더니, '"엄마는 그런 정도의 소설을 읽고 이해가 안된다면
무엇때문에 책을 읽는지 모르겠다"고 핀잔을 주었다.
아들에게 이해가 안되는 비밀의 문귀가 들어있는 '클림턴'이 뭐냐고 하였더니
아이들이 가지고 놀면서 알파벳이나 숫자를 맞추는 장난감 같은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영화를 볼 기회를 놓칠까 걱정하다가 토요일 저녁 상영을 친구와 함께 보았다.
영화의 내용보다 아직 가 보지 못한 프랑스의 루불 박물관 구경을 더 기대 하였는데
소설속처럼 루불 박물관안의 그림이 많이 나오지 않아 실망하였다.
다만 유리로 만든 삼각형의 유리 건물은 볼 수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던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감독한 ' 론 하워드' 감독의 작품이기에
구성의 복잡한, 내용의 난해성을 예상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탐색 모티브를 지닌 작품이기에 모험과 스릴.폭력이 등장하고, 갈등과 긴장의 해소로
카타르시스를 하는 작품이라고 미리 해설을 읽고 보았던 영화였다.
첫 장면은 루불 박물관의 관장이며, 소피의 할아버지 '자크 소니에르'의
나체로 살해된 장면이 나왔다.
(이게 바로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이다.
상황의 설명이 단지 한 화면으로 모두 설명될 수 있다는 것.)
'오푸스데이' 의 충실한 심복자 '사일러스'의 고행장면에 눈을 감아야만 하였다.
육체의 고행과 정화로 영혼을 정화한다는 것을 난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항상 행복한 삶을 살라고 하지 않았을까?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과 '소피'가 성배를 찾는 과정이었다.
성배는 물질적인 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예수의 피를 이어받은 여성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들이 추적을 피해 찾아간 '티빙'경은 진실을 밝히려는 베일에 가려진 사람.
성스러운 일을 한다고 하면서 안으로는 돈거래를 하는 '아링 가로사'주교.
육체의 고행을 하면서 신성한 일을 한다는 명복으로 살인까지 서슴없이 하는 '사일러스'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이 화면속에 나타났지만 생각외로 갈라지고
흐릿한 모습으로 나타나 더욱 안타까왔다.
정 중앙에 앉은 예수와 그곁의 비스듬히 옆으로 기댄 모습의 요한사도가
바로 예수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책을 읽으면서' 명화속의...'책을 찾아 보았더니 정말 여성의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얼굴 윤곽선, 다소곳이 모은 두손 영락없는 여자였다.
베드로는 왜 막달라의 목을 치는 시늉으로 손을 칼처럼 세우고 있을까?
그림속에 왼쪽 끝에서 두번째 유다 다태오가 바로 '레오나르도' 자신을
그려 넣은 까닭은 또 무엇일까?
뉴턴, 보티첼리, 위고, 다 빈치 이런 위대한 예술가 과학자들이 모두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결혼을 인정하는 시온회 소속의 회원이라고 하였다.
소니에르는 시온주의 회원이었기에 소피를 손녀딸로 가장하여 왕의 피를
상속한다고 하였을까?
난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이 진실인지? 둔한 망치로 얻어 맞은 느낌이다.
로마 교황청에 의해 편집된 성경만을 믿어 왔던 나에게 예수는 항상
독신자였고, 그의 후예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엇는데
이 영화는 많은 의문을 자겨다 주었다.
2000년의 역사가 예수의 신성성을 주장하엿고 남성위중의 역사엿기에 항상 전쟁과
살육, 고통을 강요했던 과거의 잘못된 역사였다면, 미래의 역사는
예수의 인간성. 신의 씨앗을 담은 그릇, 성배를 상징하는 여성의신성성을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가?
결국 '다빈치 코드'는 미래의 역사는 미래의 역사는 여성 중심사회가 될 것이다
하는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