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

푸른비3 2020. 8. 11. 11:17

2020. 8. 5. 수.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 2에서

백사 이항복(1556~1618) 종가 기증전이 열리고 있다.

 

백사 이항복의 15대 종손 이근형 선생이 종가에서 대대로 간직해온

조상의 유산을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붓글씨 천자문을 비롯하여 값을 매길 수 없는

유산을 보전하여 국민의 품에 안겨주었다고 하였다.

 

백사 이항복은 내가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오성과 한음이란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어 낯설지 않은 사람인데,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과 함께 기지와 작희로 기억되는 분이다.

 

오성에 대한 글을 읽었지만 지금 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에

글을 올리려고 하니 기억이 희미하여

다음에 검색하여 아래에 간략하게 옮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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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년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그 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 예문관봉교·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예조정랑 때 발생한 역모사건에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

친국에 참여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동안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황응양(黃應暘)을 조사차 보냈다.

이에 그가 일본이 보내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 마침내 구원병이 파견되었다.

 

그는 병조판서·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

1600년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 해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1608년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 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해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1617년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 경운궁. 곧 덕수궁)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 해 8월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奏疏啓議)』 각 2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李舜臣)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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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 이항복은 자유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으나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는

나라의 대들보로 임진왜란의 위기에는 조정의 버팀목이었으며, 명나라를 오가며

눈부신 외교활동을 펼쳤으며 최전선에서 싸우는 장수와 군사들을 뒷바라지 하고,

피폐해진 백성들을 어루만졌다고 하였다.

지금, 국내외로 어려운 이 시기에 이런 분이 나타났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