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못난 나무

푸른비3 2017. 1. 30. 11:37

 

이번 설 연휴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끼여 있어 더욱 짧게 느껴졌다. 

지난 추석에 잠시 안아보고 다시 고향으로 가 버린 손자의 모습은

아들이 보내 준 영상으로 나날이 또릿해지고 의젓해지는 듯 하였다.

할머니 역할도 제대로 못하였지만 며칠 전부터 손자가 기다려졌다.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안부전화를 묻는데,

지난 이틀은 기다려도 전화가 없어 내가 먼저 "아들아 바쁘니?"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곧  "윤우가 아파 정신이 없네...." 답장이 왔다.

어린 손자가 며칠 전부터 장염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들이 대학 졸업반 늦가을,   뜻밖의 사고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은 졸업 시험도 치르지 못하고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지인의 소개로 지방의 영세 기업에 입사하여 생계를 도맡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던 나는 그런 아들이 대견하고 기특하기만 하였다. 

 

그 다음 해,  딸이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올 무렵,

아들은 자신은 혼자서 잘 지낼 수 있으니 엄마는 동생 뒷바라지 하려

서울로 가라고 적극 권장하여, 고향을 떠나 서울살이를 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도 못하였는데. 늦은 나이에 낯 선 서울로 이사하였다.

 

점점 고향 나들이도 힘겹게 여겨졌고, 아들의 원룸을 청소해 주는 것이

귀찮게 여겨졌고, 오히려 고속도로를 달려 한강다리가 보이면 고향처럼

마음이 편안해 질 무렵,  아들은 며느리감을 데리고 오겠다고 하였다.

휴일에도 컴퓨터 오락만 하여 아가씨는 언제 사귈거냐고 야단하였는데.

 

독신주의자였던 나는 친구의 소개로 만난 남편과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였다.

직장생활과 시집살이의 곤단함속에서 감기가 심하여 감기약을 먹었고,

한 참 후에야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독한 항생제를 먹은것이 걱정이었으나.

하느님이 주시는대로 받아 기르겠다고 결심한 후 태어난 아들이었다.

 

오랜 진통끝에 태어난 아들이 눈과 코, 귀와 입, 손가락과 발가락이 5개 

모두 정상이라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감사하였는지 모른다.

항상 착하고 건강하고 슬기로운 아이로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내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아들은 건강하고 착하게 잘 성장해 주었다.

 

공부하기보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하였던 아들은 학창시절부터

성당 주일학교 미사시간에 마이크를 잡고 성가를 선창하였으며,

장애아 돌보기,  노인 목욕봉사등 봉사할동에 참여하였으며,

대학시절 4년 동안 쭉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 하여 나를 감동시켰다.

 

아들이 늦도록 결혼도 하지 않으면 어쩌나....걱정하였는데,

막상 그 해 추석에 며느리감을 데리고 온다고 하니 반갑기도 하였지만,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아가씨를 데리고 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아들과 함께 온 아가씨는 이목구비도 반듯하고 착하고 참하였다.

 

회사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밤늦도록 컴퓨터를 하고,

아침밥도 챙겨먹지 않고,  방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은 아들을

이제 며느리에게 맡기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이고 편안하였다.

아들과 함께 살아주는 며느리가 더없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때가 되니 귀여운 손자를 내게 안겨 주었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 재롱은 볼 수 없었지만,  나날이 자라는 모습을

영상을 통해 보면서 이제 곧 설이 되면 안아 보겠구나.....생각하였는데

장염이라니 그냥 오지 마라고 할까? ....생각이 들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손자보고픈 마음이 앞섰기에 천천히 조심해서 오라고 하였다.

목요일 저녁에 도착한 손자를 안아보기도 전에 칭얼거리고 토하였다.

잠자리가 바뀌니 더욱 힘든지 밤에도 계속 칭얼거려 밤중에 응급실로

보내고는 '이번에는 오지 말라고 할껄.....' 뒤늦게 후회하였다.

 

새벽에 집으로 돌아온 손자는 다행히 증세가 호전되어 방긋 웃었다.

밤새 잠 못 이룬 아들과 며느리를 바라보니 측은하고 미안스러웠다.

한 숨 자고 난 아들은 차가 없는 엄마를 위해 함께 장을 보려 가 주었다.

자신의 카드로 계산을 하는 아들이 남편처럼 든든하고 믿음직하였다.

 

차례를 모시고 자고 있는 아들에게,  전 날 저녁 내 여고 동창생이 

전화를 하여, 동창생 아들의 집을 찾아가 여권을 찾아서 마산 내려오는 길에

갖다 달라는 어려운 부탁을 하였더니, 아들은 순순히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친구인 나도 하기 어려운 그 일을 아들이 해 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지.

 

옛날 친정 어머니는 못난 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공부를 많이 시킨 잘 난 아들은 멀리 떠나 어머니를 돌 봐 드리지 못하지만,

못 난 아들이 어머니의 곁에서 어머니의 시중을 들며 효자 노릇을 한다더니,

내 아들도 못난 나무처럼 고향을 지키는구나....뿌듯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