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1,2
한승원장편소설
열림원.
神筆 뒤에 가려진 ‘인간 추사’ | ||
『추사』
한승원 지음 / 열림원 기사등록일 [2007년 10월 10일 수요일] | ||
* * * 소설가 한승원님은 1939년 전남 장흥 출생으로 어촌의 생활을 소재로 글을 쓴 소설가로 기억된다.
구수한 남도 사투리를 글속에 그대로 사용하여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몰라 짜증이 나기도 하였다.
요즈음은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하여 해산토굴을 지어 그곳에서 집필에 전념하고 부터는 많은 좋은 글을 써 내는 듯 하다.
<초의><다산>등 조선 말기의 실존 인물을 소설화 한 글은 많이 쓴다. 내가 활동하는 카페 <옛그늘 문화 답사회>에서 그분의 해산토굴을 두번이나 방문하였지만 나는 일정이 맞지 않아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실존인물을 소설화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을 것 같다. 수많은 참고 문헌을 섭렵해야 할 것이고 혹시 그분의 후손들에게 누가 될까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김정희 같은 학자는 200년전의 대학자이므로 문헌은 많이 남아 있어 참고하는데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지은이는 이 글을 쓰는 동안 김정희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와 하나가 된 느낌으로 글을 썼다고 후기에 적혀 있었다.
책 한권을 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를 알기에 지은이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파란 만장한 일생을 살다간 추사의 명복도 빕니다. (어제 저녁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명복도 빕니다)
추사 김정희는 1786(정조10년)에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서 6세에 한양 월성위궁의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입적한다. 7세때 입춘첩을 대문에 서 붙였는데 마침 지나가던 채제공이 그걸보고 장차 글씨로 이름을 드날리라고 예언한다.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북학자가 된다. 24세에 생원시 합격. 34세 문과 급제. 동지부사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중국 연경에 가서 당시 청나라의 문물을 접하고 새로운 문화에 충격을 받고 대학자 옹방강과 완원등의 스승과 인연을 맺다.
충청우도 암행어사, 예조참의, 덕인세자의 보강원 보덕, 성균관 대사간, 형조참판을 거쳐 55세에 연경에 갈 동지부사가 되었지만 안동 김씨의 당쟁에 휘말려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된다.
9년의 위배가 끝나고 63세(헌종 14년)에 해배되었으나 다시 탄핵 상소 문제로 66세에 북청으로 유배된다. 67세에 해배되어 과천에서 은거하다 71세에 봉은사에서 부처님에 귀의하고 경판각을 저장하는 전각인 '판권'이란 명필 현관을 쓰고 그해 10월10일 이승을 하직하다.
교과서에 실린 김정희<세한도>의 그림을 처음 접하였을적에 문인화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의 그림에서 겨울 들판과 같은 어떤 쓸쓸함과 강인함, 차가운 고독감을 느꼈다.
그건 바로 그가 주장하던 서권기와 문자향이 스며있는 그림이어서일까? 마른 붓질의 거칠고 뒤틀린 그 청정한 소나무에서 쏴아한 솔냄새가 나는 듯 하였다. 그리고 바람벽에 동그랗게 그려진 그 창에서는 왜 그렇게 외로움, 고적감이 스며들든지....
나중에 제주도 방문시, 내가 직접 친구의 안내로 대정리의 그의 박물관과 위배지를 찾아갔을 적에 초겨울의 쌀쌀한 바닷 바람에서 그의 고적감과 외로움을 느꼈다.
나는 아직 그의 학문의 세계는 알지 못하지만 그는 지금 수많은 서예가의 존경과 칭송을 받는 인물이라는 것을 전에 어느 지방에 몰려든 그의 학회를 통하여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몇년 전 예산에 있는 그의 고택을 찾았을적 아, 참 대단한 집안의 자손으로 부귀 영화를 누리면서 살다간 사람이었구나....이런 생각만 하였는데 이번 한승원의 소설속에서의 추사는 나와 같은 슬픔과 오로움을 겪은 한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물론 신동으로 태어나 남다른 재주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 친부모를 떠나 양부모밑에서 얼마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수많은 밤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하게 되었다.
첫쩨부인을 사별하고 둘째 부인과도 그렇게 살가운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였던 것 같았다. 초생에게서 서자인 상우를 두었지만 서얼차별법으로 아들이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을 참으로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하는 그의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양자인 상무에게는 부정을 느끼지 못하였는 듯 하였고 스스로 그의 제자가 되어 남장으로 꾸며 들어온 초생이에게서 애정을 느꼇던 것 같았다.
그가 제주도에서 해배되어 왔을적에 부인 이씨는 먼저 사별하고 초생이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처소를 마련하여 그의 노후를 돌보아 주었으니 그의 말년이 그렇게 쓸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는 초의 선사, 권돈인, 조인영등 당대의 학자와 선승을 친구로 두었고 소치와 같은 유명한 화가를 제자로 두어 항상 그를 따르고 돌보았으니 인덕을 타고 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타고난 천재라고 하기보다는 수천권의 책을 읽고 수많은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기 까지한 노력의 소산으로 지금의 그가 우뚝 서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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